어느 날 친구가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딱 끊을 수 있냐고. 가을의 끝자락을 붙잡고 싶어 함께 산책하고 같이 간 식당에서 내가 비빔밥 위에 얹어진 계란 프라이를 걷어내 친구에게 건네주고 먹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하면서. 친구는 내가 지난 8월부터 채식을 시작한 지 알고 있었고, 그도 몸이 건강한 편이 아니라 지난 2년간 지독하게 음식 조절을 해왔지만 지금은 배달음식도 시켜먹고 인스턴트도 가끔 먹는다고 했다. 그런데, 만행에 가까운 나의 행동에 많이 놀란 듯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냥 계란일 뿐인데. 그래. 그냥 계란일 뿐인데. 달걀은 아무 죄가 없긴 해.
채식한 지 6개월에 접어든 지금, 생선을 포함한 모든 동물성 식품, 계란과 유제품까지 모두 끊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그만큼 절실하기 때문이다. 지난 3년간 괴롭혀왔던 두통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이제 겨우 일상을 되찾았는데,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리고 입맛은 희한하게 어느 정도 지나니 좀 변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살면서 절실하다는 것의 의미를 잘 몰랐다. 특히 10대, 20대 땐 절실한 게 없었다. 잡지에 나오는 케이트 모스(지금은 대세 모델이 누군지 잘 모른다.)처럼 한번 말라봤으면 좋겠다는 지나가는 바람은 있었지만 그것이 소원은 아니었다.
90년대 대세 모델 케이트 모스
현재 교사로서 바라던 삶을 살고 있는 친구에게 대학 재수, 임용 삼수의 시기를 거칠 수 있었던 비결을 묻자 마찬가지로 절실함이라고 얘기했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내가 너무 소중해서 내가 바라는 것, 내가 나한테 주고 싶은 것 그것 말고는 다른 인생을 생각하기 조차도 싫다.
남들 벚꽃놀이 가고 단풍놀이 갈 때 다이어리가 너덜너덜 해질 때까지 공부계획을 세우고 도서관에서 스스로와 싸우며 20대를 보낸 친구는 내게 절실한 마음으로 무엇이든 될 때까지 하면 해낼 수 있다고 강조했는데, 자존감이 낮고 불안했던 어린 시절, 그땐 태산 같던 그 친구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도대체 절실한 게 무엇인지.
나는 절실한 것이 결혼 후에 생겼다. 아이들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우리 가족을 위해서라도 아프고 싶지 않았다. 우리 아이들이 엄마에게서 좀 더 안정적이고 평온한 사랑을 느꼈으면 좋겠고, 아이들에게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이들에게 확신에 찬 엄마의 말을 들려주고 싶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초보 엄마일 때는 아이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은데, 무엇이 정작 좋은 것인지 몰라 방황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어린 내 자식에게 중요한 것은 장난감과 예쁜 새 옷, 화려한 사교육이 아니라 엄마가 햇님처럼 빛나는 모습이라는 것을 지금은 안다. 그래서 엄마로서 뿐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더 잘 살고 싶다.
올해 10살, 4살이 된 아이들 작년 2월 거제도에서
최명희 님의 대하소설 [혼불]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인생은 공들이는 것이니라.
어차피 죽어 없어질 몸, 무엇하러 사냐는 물음에 대한 최고의 답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현재를 열심히 사는 것 외에는 그 어디에서도 의미를 구할 수 없다. 어느 누구 하나 인생 공들이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요즘 그 어느 때보다도 공들이면서 사는 것 같은 내 모습이 마음에 든다. 살림하고, 육아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또 식단을 절제하면서 살아간다. 누가 보면 참 재미없이 산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게 내게는 내가 나 자신에게 주고 싶은 것, 내게 공들이는 것, 내가 아이들 앞에서 떳떳하게 엄마는 엄마 인생 잘 살고 있다고 말해줄 수 있는 부분인 것 같다. 엄마는 엄마 자신이 소중해. 그러니 너희들도 너희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공들이며 살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