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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도 Jan 12. 2021

한 해


진안으로 강의를 다녀온 날이었다. 전북권이라는 같은 둘레 안에서 자랐지만, 살면서 진안에 방문한 건 처음이었다. 초행길은 언제나 멀게 느껴지는 법. 차량에 등록된 내비게이션이 도착까지 오십삼 분이 걸린다고 알려준다. 정말 편한 세상이다. 흔히 말하는 요즘 시대에 태어나지 않고, 부모님 세대에 태어났더라면 얼마나 불편함이 많았을까 생각하게 되는 출발이다. 오후 2시 강의였는데, 긴장하는 성격 탓에 따뜻한 얼그레이 한 잔으로 공복을 달래기로 결정했다. 강의를 진행하는 곳은 진안의 한 고등학교. 2학년을 대상으로 이미지에 관련된 강의를 하게 됐다. 사실 학교의 첫인상은 놀란 감정이 더 컸다. 이런 곳에 학교가 있을 거란 생각을 못했으니까. 도로에서 로터리를 돌다가 네비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방향을 틀었는데, 언뜻 공장처럼 보이는 컨테이너 건물이 보였다. 이곳이 정말 맞는지 주변을 빠르게 둘러봐도 네비는 야속하게 목적지에 도착했다며 안내를 종료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종료됐다. 깊은 당황에 빠지려 하는 찰나,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자 건물 뒤편으로 학교가 보였다. 봄이면 꽃과 함께 고라니가 등장하고 심심치 않게 뱀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라면 틀림없이 순수할 것 같은 그런 기분을 줬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도 어언 십 년이 가까워졌다. 언젠가 강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나보다는 나이가 어린, 내가 조금이라도 더 도움을 줄 수 있는 학생들을 만나고 싶었다. 사실 진안도 강의도 처음인지라 평소의 나였다면 긴장을 훨씬 많이 했을 텐데, 신기하게도 설렘이 더 컸다. 큰 꿈을 이룬 뒤로는 작은 꿈들을 갖고 생활하고 있다. 처음 이룬 큰 꿈은 방송과 관련된 직업을 갖는 것. 작은 꿈들은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해보고 싶던 일들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이번 추석에는 고등학교 때부터 꿈꾸던 라디오 디제이를 하게 됐고, 지금은 작게나마 꿈꾸던 학생들 앞에 서는 일을 하게 됐다. 하고 싶었던 일을 이루어 나간다는 것은 가슴속에 벅차오르는 쾌감이 있다. 내년까지는 삼재에 아홉수라 무엇도 바라지 말고 조용히 지내라던 점쟁이의 말이 문득 떠올랐지만, 역시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닌가 싶다. 적당히 섞인 떨림과 설렘을 느끼면서 아이들을 만났다. 기억 속의 학교와는 많이 달라진 모습에 어색하기도 했다. 그 이유가 시간이 흘렀기 때문인지, 이곳이 시골학교이기 때문인지는 물어볼 사람이 없어서 아쉬웠다. 준비했던 강의 속에 나름 나의 이야기를 많이 녹여내려 노력했던 것 같다. 딱딱한 것보다는 부드러운 걸 좋아하는 성격 탓도 있었고, 나에게 주어진 두 시간이 일당 그 이상의 가치로 남기고 싶어서였다. 이미지에 관련된 주제만큼이나 아이들이 앞으로 더욱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조금 더 빨리, 더 넓은 세상을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주제넘은 바람도 있었다. 긴 시간을 어떻게 채울까 막연한 걱정도 있었는데, 역시 무대체질인가 보다. 수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귀에 맴돈다. 강의를 마치고 다시 집으로 향하는 길, 눈이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보통 어딘가에 갈 때보다 돌아올 때 더욱 빠르게 느껴진다고 한다. 거리가 다를 리는 없지만, 아마도 향하는 마음은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날 유독 집으로 향하는 시간이 길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겨울인 이유로 눈이 내렸을 것이고, 눈이 내린 이유로 나는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를 움직인 건 세찬 눈보라도, 점쟁이의 말도 아니었다. 그저 나만의 속도로 천천히 나아가는 것. 작은 시골 학교에서 돌아본 나의 이천이십 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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