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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샌님 Apr 16. 2023

엄마 아빠랑 재밌게 놀았다

2. 늙은 딸은 체력이 달려요


2023.04.15 토요일

 


다 큰 어른 3명은 애써 눈 비비며 버티다가 11시도 채 되지 못해 잠이 들었다. 

눈을 번쩍 뜨고 보니 7시 32분. 

바깥의 소리를 들어보니 부지런한 아빠는 벌써 바깥을 몇 번 들락날락한 것 같고, 엄마도 일어나셨는지 나는 켜본 적도 없는 TV소리가 들렸다. 


본가에서는 늘 들을 수 있었던 소리다. 주말 아침에 저절로 눈이 떠지면, 아직 자는 내가 깰까 봐 조심조심 거실과 부엌을 오고 가던 가족들 발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집을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잊고 살았던 감각이다. 생경한 기분으로 방문을 열고 나와 부모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깔깔 웃으며 "애기가 됐네."하고 날 끌어안는 엄마도, "뭐고, 우리 집에 이런기 있었나."하고 웃는 아빠도 스스로의 행동에 어이없어하는 나도 웃기기는 마찬가지다.


한참을 웃고 나서 밥 먹고 마시지 하는 엄마의 타박을 뒤로하고 커피를 내렸다. 이건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주말선물이기 때문에 밥은 먹지 않아도 커피는 마셔야 했다. 


베이스가 그레이계열인 집을 조금이라도 밝게 보이게 하기 위해 내가 선택한 컬러는 <노랑>.

그래서 우리 집엔 포인트컬러로 곳곳에 노랑이 있다. 

식기도 머그컵도 노랑+아이보리.

전기포트와 일리 커피머신도 노랑. 

침구와 커튼과 식탁보도 노랑이다.


불편하고 작지만 예쁜 제니퍼룸전기포트와 그 옆의 저렴이 일리 커피머신을 나란히 두고 노란 머그컵에 커피를 내리자, 뒤에서 엄마의 말버릇이 들렸다.

"아이고 귀여워라. 소꿉놀이 하는 것 같네."

우리 엄마는 내가 일흔을 먹어도 귀엽다고 할 것이다.


우리 엄마가 생각하기에 귀여운 커피를 나눠 마시고, 아침을 간단히 챙겨 먹고 집을 나섰다. 

주말에는 이불빨래 외에 절대 외출하지 않지만 내가 사는 곳을 함께 구경하고 싶었다.



도착한 수목원은 이른 오전 시간이라 중앙에서 하는 행사 외엔 한산했고, 비는 곧 쏟아질 것 같기도 했지만 아직 오지 않았다.

약간 헤매면서 주차를 했고, 또 헤매면서 입구를 찾고, 잘못 들었다가 다시 돌아오면서 구경한 수목원은 꽤나 만족스러웠다. 날씨가 밝았으면 더 좋았을 광경이지만 알록달록 핀 튤립들은 우리 엄마를 즐겁게 하기에 충분했다. 

약간 촌스러운 조형물 앞에서 사진을 찍고, 다음엔 커피와 다과를 챙겨 와서 즐기자며 다음을 기약하며 튤립, 이름 모를 꽃과 나무를 구경하고 한 바퀴 돌아 나오는 길에 놀이터가 보였다.


"아, 나 그네 타고 싶다. 그네 좋아하는데."하고 중얼거리자 엄마가 "저기 저 그네 있다. 그네타고 가자."라며 다 큰딸의 등을 떠밀었다. 

다 큰 이후엔 맥주 한 캔 후에 어두컴컴한 저녁의 놀이터에서 잠깐씩 타던 그네 이후로, 

밝은 대낮에 어린이들 사이에 끼여서 그네를 타보기엔 처음이었다. 


조금 부끄러웠지만 재밌는 걸 기다리는 부모님의 기대를 뒤로하고 그네에 앉아 땅에서 발을 떼자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기분 좋은 부유감을 느끼고 있자 앞에서 "오 잘 타네."(당연)하는 부모님의 칭찬이 더해졌다. 


29살 딸의 그네 타는 모습을 앞에서 카메라로 찰칵찰칵 찍는 부모님의 민망함을 뒤로하고, 

맞은편 영유아용 그네에서 3살 베기 아기가 그네에 앉아서 부모님의 칭찬을 받는 모습이 보였다. 


상상해 보라, 맞은편에의 걸음마를 하는 것만으로도 장한 3살 아기의 성장과정을 기록하는 젊은 부부와 

이제 성장은 끝난 지 오래에 함께 잘 늙어가는 것만 남은 딸의 그네 타는 모습을 촬영하는 중년의 우리 부모님. 

너무 부끄럽고, 웃기고, 어이없고, 이상한 감정이 밀려왔다.


근데 뭐 우리 엄마 아빠가 저렇게 좋다는데, 다 큰 딸이 그네를 타기만 해도 좋다는데 그게 뭐 대수인가 싶다.



수목원을 나올 때쯤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대나무숲을 둘러 나와 차에 올라서 카페를 갔다. 

주차자리가 너무 복잡해서 같은 곳을 정말 10바퀴는 돌았지만(이 동네는 절대 차를 가져오지 않기로 다시 한번 다짐했다.) 다행히 좋아하는 카페는 한산했고, 커피를 마시다가 배고프다고 하는 부모님 덕에 밥-커피가 아닌 커피-밥을 먹는 이상한 패턴이 완성되었다. 


이것을 두고 아빠는 "고정관념을 깨야하는 거다."라고 했다.


밥집은 웨이팅이 있는 곳으로 줄 서서 기다리는 식당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걱정했지만 부모님은 가게 앞에서 잘 기다렸다. 오히려 춥지 않냐며 옷을 벗어서 덮어주며 나를 걱정했다. 


들어가서 먹은 밥은 그렇게 맛있진 않았지만 부모님은 자기들끼리는 절대 오지 않을 식당을 경험하게 된 것에 썩 만족한 눈치였고, "딸내미랑 같이 다니면 이런데도 온다."라며 꽤나 즐거워했다. 


밥을 먹고 어떤 개념 없는 운전자의 만행으로 8대 정도가 길에서 오고 가도 못하는 불상사가 발생했지만, 

(경상도라면 진작 마주 보고 있는 운전자가 내려서 '아저씨!'하고 외치고 뒤차는 빵빵거렸을 상황에서 한참을 아무도 아무 액션을 취하지 않고 기다렸다.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곳을 지나오는데 40분 걸렸다.

그 운전자는 반성하길.) 

좋은 게 좋은 날이라며 내 집에 무사히 도착하였고, 내 체력의 할당량이 다했다는 것을 안 부모님은 본가에 갈 준비를 시작했다. 


물론 엄마는 가고 싶지 않아 했고, "더 있다 가면 안돼?"를 연신 외쳤으나, 아빠는 "일찍 가야 또 불러준다."라며 일축했다. 나도 속으로 끄덕끄덕 거렸다. 역시 아빠는 내 마음을 잘 안다.

부모님을 사랑하지만 나는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여기 온 지 50일째. 

그동안 부모님은 총 3번의 방문을 했지만, 마음 여린 엄마는 나를 두고 갈 때마다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2월에 처음 나를 내려다 주고 갈 때 부모님의 얼굴을 기억한다.

엄마는 물론 아빠도 눈물을 참는 기색이 느껴졌다. 


전에 살던 곳 보다 훨씬 좋은 조건으로 집을 구했는데도, 괜찮은 직장인데도 뭐가 그렇게 안쓰러웠을까.


2시간 반 뒤에 집에 도착했다고 전화가 왔던 엄마는 결국 못 참고 전화를 하면서도 엉엉 울었고, 

그 뒤에 전화를 걸어 엄마가 집 가는 내내 울었다고 일러주던 아빠 역시 울었다는 것을 역시 엄마가 일러주었다. 


두 번째, 세 번째의 방문으로 아빠는 이제 울지 않지만 엄마는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헤어질 때마다 나를 꼭 안고 그렁그렁한다. 

그리곤 출근길 가끔 생각나서 하는 전화에 반가워한다. 저녁 먹을 때 가끔 거는 영상통화에 내가 사준 망고가 너무 맛있다며 고마워한다. 

뭐가 필요하진 않냐고, 두고 온 별것 아닌 물건을 찍어 보내면서 '갖다 줄까?'하고 묻는다. 


다음 주에 외할머니 생신이셔서 외가에 가야 하면서도 "그냥 울 엄마 안 보고 내 딸 보러 갈래."라며 투정한다. 


어쩜 그렇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까. 

나는 가족을 사랑하지만 그래도 어떤 부분에서는 내가 우선이라, 내가 받은 사랑만큼 누군가를 사랑할 자신이 없다. 


그나마 우리 집에서 가장 냉혈안인 나조차도 가끔 눈물짓게 만드는 엄마아빠의 저런 말들이 나를 버티게 한다.


아이고, 나도 나이가 들었나. 주책맞게 눈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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