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상하게 말라 색 조차도 희미하게 바래진 회색 나뭇가지 위로 하얀 눈이 내린다. 결정체들이 그 위에 살짝 몸을 기댄다. 잣눈이 내려 더욱 더 쌓인다. 위에서 꾹꾹 눌러대는 통에 아래에 있던 눈은 버티지 못하고 서로 엉킨다. 짓이겨져 단단해진 눈은 서름서름했던 거친 나뭇가지의 손을 잡는다. 서로를 부둥켜 안 듯, 톱니바퀴가 맞물리 듯 단단히 들러붙어 떨어질 줄 모른다. 겨울 나뭇가지 위에 꽃이 피었다. 볕살에 눈부시게 빛나는 하얀 설화가...
고개를 몇 번 털어 상상 속 눈을 날려 보낸다. 머릿속 풍경이 연기처럼 사라진다.
연탄 봉사를 하러 서울로 향했다. 아침 일찍 출발해 고속도로를 달린다. 창문을 살짝 열었더니 얼굴에 닿은 차가운 가을바람에 볼은 살짝 발그레해진다.
고속도로 가장자리마다 색을 맞춘 나무들이 양쪽으로 늘어서 있다. 빨강, 노랑, 주황 반복되며 규칙적이다. 그라데이션을 그린 듯한 아름다운 풍경에 눈이 즐겁다.
윗지방으로 올라갈수록 메마르고 헐벗은 풍경을 마주한다. 어느 순간 눈길을 확 사로잡는 나뭇가지들의 군집들이 나타난다. 아직은 가을의 끄트머리인데 이미 매달린 잎이 하나도 없다. 나뭇가지가 어찌나 새하얗고 앙상한지 과수원 가득한 나무들이 빠르게 달리는 차창 너머로도 눈에 들어왔다. 그 위로 하얀 눈이 내리는 상상을 한다. 앙상한 나뭇가지여야만 내린 눈이 떨어지지 않고 나뭇가지 모양 그대로 눈꽃을 만들어낼 것이다.
제주도에서 봤던 설화가 기억 아래에서 스친다. 몇 해 전 한라산 등반만을 위해 일박이일로 제주도에 갔다. 백록담을 보고 싶은 열망을 가득 담고 눈꽃이 펼쳐진 세상을 꿈꾸며 시작한 겨울 산행이었다. 운이 좋게도 눈앞에 펼쳐진 눈을 만났다. 양쪽으로 펼쳐진 눈꽃들에 정신을 못차리며 걷고 또 걸었다.
여린 눈 결정체 하나하나가 솜털처럼 가볍게 흩날려 이파리 하나 없는 불모지인 나뭇가지 위로 자리 잡는다. 다른 결정체들을 불러 모아 촘촘하게 나뭇가지 위로 쌓인다. 두께감이 생겨 더 끈끈하게 달라붙으면 나뭇가지 모양 그대로 설화가 된다.
어느 여름날 초록빛 싱그러운 나뭇가지가 눈을 갈망한다. 그러다 막상 눈을 만나면 추워서 바들바들 떨다가 이내 시들거나 냉해를 입을 것이다.
한여름 초록잎에 눈이 내리면 잎이 얼어버리는 것처럼 어떠한 일도 어울리는 시기가 있다. 겨울날 마른 나뭇가지 위에 내린 하얀 눈이 차가운 겨울바람에도 부서지지 않는 눈꽃을 형성한다.
생각해보면 지난 인연들은 내 여름에 만난 눈이었을까. 어울리지도 않는데 설렘과 무모한 열정으로만 가득했던 걸까. 푸릇한 잎을 빛내며 멋모르던 시절에 만난 눈은 내 잎에 상처만 내고 사라졌다.
아무도 곁에 없는 것에 익숙해져만 갔다. 그런데 내 위로 눈이 내린다. 마른 나뭇가지 같았던 내 마음에 내려 포근히 새하얗게 내 계절을 안아준다. 그렇게 만날 인연은 만나는 건지도 모르겠다. 수십여년이 흘러도...
머지않아 따뜻해지는 봄이 되면 눈은 녹아서 내 안으로 흡수되고 그 마음을 양분 삼아 내 안에서는 또 하나의 작은 새싹이 움트겠지.
후두둑 발목이 빠질 정도로 잣눈이 내리면 나뭇가지 마디마다 눈꽃이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