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깊어지고 익어간다. 어느덧 8월 말. 무심히 걷던 내 귓가에 언젠가부터 풀벌레 소리가 내려앉는다. 아직은 습하고 더운데도 가을은 천천히 다가오고 있나보다.
지금 우는 풀벌레는 귀뚜라미일까. 고요한 밤이 되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그들만의 시간이 열린다. 뜨거운 태양과 천적을 피해 숨어있던 몸을 드러내고 두 날개를 비벼 선명하고 높은 소리를 찌르륵 거린다.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는다. 나는 어느덧 스물 일곱으로 돌아가 담양의 어느 한옥 안채에 누워있다. 혼자서 전라도 여행으로 들렸던 민박집은 찻잔과 골동품으로 가득했다. 보기만해도 깊은 소리가 날 것같은 축음기에서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여름이었다. 지금처럼 여름의 끝 즈음이었다. 기억의 파편에서 찾은 나는 그곳에서 반팔과 반바지를 입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한 눈에 단정하게 정리된 초록 정원과 다정한 냄새가 날 듯한 시골집이 보였다. 집까지는 마당돌이 길게 연결되어 있었고 애교많은 강아지는 꼬리를 흔들었다.
집주인은 미술교사를 하시며 민박도 한다 하였다. 스스럼없이 손님에게 안방을 내어주고 차와 커피를 대접하였다. 집안에는 발디딜 틈 없이 골동품과 옛 물건들이 가득했지만 번잡스럽거나 지저분하지는 않았다. 옛것의 오래된 쿰쿰한 냄새가 싫지않았다.
소리를 비교해보라며 현대식 스테레오와 축음기를 이용해 차례대로 음악을 틀어줄 때는 잘 모르는 나도 왠지 전문가가 된 듯 했다.
거기에서 같은 여행자로 처음 만난 언니와는 내일 함께 땅끝마을을 여행할 것을 약속했다.
잠 자리 옆에 가득 쌓인 찻잔과 다기들은 적적한 밤시간에 동무가 되어주었다. 딱딱한 바닥에서 피어나던 나무 냄새를 맡으며 잠을 청하려 눈을 감았다.
그 순간 고요한 어둠 속 침묵을 뚫고 풀벌레 소리가 대기에 가득찼다. 빈틈없이 사방에서 울려대던 풀벌레 소리는 근원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고막을 세차게 흔들었다. 어찌나 맹렬하고 거센지 귀가 멍멍할 정도 였지만 눈을 감으니 밤하늘 별 들 사이를 떠다니는 듯 몽환적이었다.
감았던 눈을 떴다. 상그러운 현실에 서있는 내게 여전히 풀벌레는 울어 댄다. 풀벌레 소리를 타고 싱그러웠던 그때로 되돌아갈 기억이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마냥 찬란했던 그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