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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나 Jan 23. 2023

엄마와의 거리 260Km.

섞이지 않는 관계.

마음을 먹어야 올 수 있는 거리 260Km.

이 거리를 나는 주야장천 다녔다. 

아이가 3살 때부터 카시트에 아이를 태우고 내가 운전을 해서 일 년에 한두 번은 꼭 친정을 왔다 갔다 했다. 

어쩌다 남편이 시간이 되면 함께 왔다가  남편은 하루 이틀 후에 먼저 가고, 나는 길게는 3주 짧게는 2주씩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아이가 이제 초등학생이 되니 버스를 타는 것도 재미있어했다.

아가 때보다 짐도 많이 줄었고, 짐이 많으면 택배로 먼저 보내고 우리는 프리미엄 버스를 타고 친정에 갔다.

점점 장거리 운전도 힘들어지는 데다가 이미 난 차를 팔았으니까.

입학을 하기 전에는 내가 있고 싶은 만큼 친정에 머물러도 되었는데, 이제는 아이의 스케줄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아이와 엄마를 위해서 아이의 방과 후를 째고, 피아노 태권도를 쉬고 2주 예정으로 친정으로 왔다.

아이는 아예 방학 내내 있다 가기를 원하지만, 그건 사실 내가 자신이 없다.

각자의 생활이 익숙해진 건 이미 오래된 일.

이제 와서 한 달씩이나 같이 섞이는 게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다. 

엄마라고 해서 마냥 좋은 관계만은 아니다.




이번엔 명절에 맞추어 남편이 시간을 냈고, 우리는 친정으로 왔다.

언제나 복잡하고 상, 하행선 어느 쪽으로든 차가 밀리는 시기는 피해서 친정엘 왔었는데, 그나마 다행인 건 모두들 내려가느라 바쁠 때 우린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에 친정으로 오는 길은 5시간이 걸렸다. 

남편과 교대로 운전을 하며 왔어도 이제 나나 남편이나 더 이상 청춘이 아니다.

엄마는 신이 났다. 오랜만에 사위도 함께 올라온 데다가 얼마 전에 티격태격한 딸도 왔으니까.


사실 우리는 오랜만에 만나서 제일 좋은 시간은 2-3일이다.

그건 내 아이가 3살 때도, 5살 때도, 7살 때도 그랬다. 

그러고 보면 내가 대학을 멀리 가면서 엄마랑 떨어지기 전까지는 어떻게 매일을 같이 살았는지 의문이다.

그때는 지금처럼 안 맞는다는 생각을 안 했던 것 같은데...

딸은 나이가 들수록 엄마와 친구가 된다던데, 나는 왜 엄마와 여전히 친구가 될 수 없는지도 의문이다.

오히려 나이가 들면서 우린 더 많이 싸우는 것도 같다.

엄마는 점점 아이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고, 나는 이미 내 아이의 엄마라는 것도 버거운데 마치 아이 하나를 더 케어해야 하는 것 같아서인지 마음이 영 불편하다.

사사건건 잘 부딪히는 이유가 마음의 거리인 듯도 하고, 물리적인 거리인 듯도 하고, 거꾸로 가는 시계처럼 내가 엄마에게 받을 걸 다 뱉어내야 할 시기가 온 것도 같고, 지구는 둥그니까 그렇게 둥글게 둥글게 돌아오는 가보다.


어쩌면 나도 아직 덜 자란 어른인지도 모른다.

나도 더 자라야 하는데 그 시간을 못 기다려주고 엄마가 이제 '네 차례야' 하는 것만 같아서.

엄마는 내가 더 자라야 하는 어른이라는 것을 아직 모르는지 인정을 하지 않는 건지.

예전처럼 엄마한테 기대도 된다고 해주면 좋을 텐데, 이제 자꾸 나에게 뭔가를 받아내려는 사람처럼, 내가 혼자 다 할 수 있는 어른으로 인정해 버린 듯하다.

그래서 나의 생각과 나의 행동을 인정하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어한다.

나는 그런 게 속상한데... 그래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왜 그때뿐일까.

금방 잊어버린 것처럼 다시 엄마는 엄마 생각만 하는 것이다.


나는 엄마가 없으면 못 살 것 같은 어린아이와 똑같은 마음인데,  엄마를 보면 '나는 엄마처럼 저러지 말아야지, 자식 마음을 몰라주는 엄마는 되지 말아야지'하고 다짐을 하고 또 한다.

사람이 늙으면 아이가 된다고 하더니, 노인네들은 치매와 상관없이 점점 어린아이로 돌아가려 하나 보다.

엄마는 나와 260Km를 유지하려는 것일까.


이번에는 늘 만나면 가장 좋은  2-3일이 채 가기도 전에 벌써 전반전을 치렀다.

그 사이에 더 이기적인 사람이 되었나 싶어 나는 무척 당황스럽고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엄마가 저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싶은 게 자꾸만 낯설어진다.

이 낯선 상태에서 내가 2주를 버틸 수 있을까.

안 봐도 뻔한 것들. 나는 이미 우리가 어떻게 2주를 보낼지 안 봐도 눈에 훤히 보인다.

이틀에 한 번은 티격태격하고 말 한마디 안 하다가, 또 아무 일 없던 듯 산책을 가고 쇼핑을 하고 밥을 먹겠지.

내 아이가 아닌 내가 엄마가 보고 싶어서 달려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 때문에 온 거라고 주문을 걸겠지.

쌓인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엄마로부터 상처를 받은 어린 시절이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린 어째서 이렇게 안 맞는 걸까.. 생각을 하겠지.

엄마보단 내가 지식인이니까 내가 더 이해를 해야 하나 싶다가도, 내가 이해만 하면 엄마는 사는 동안 이해받기만 바랄 테니까 그건 또 옳은 방법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겠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까. 2주 내내 생각만 하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오겠지.


드라마에서처럼 이해하기 위해 글감으로 쓸까?

글을 쓰다 보면 이해도 인정도 용서도... 다 된다던데.

그렇다면 나는 글감이 정말 많은데.

왜 세상은 나에게 글감을 많이 주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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