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아주 보통의 하루
90년대에는 비 오는 날에 대한 가요가 무척 많았던 것 같다.
김건모의 빨간 우산
비 오는 날 아침은 언제나 내 맘을 설레게 해 우연히
내 우산과 똑같은 빨간 우산을 쓴 소녈 봤어 한참을
망설이다가 건넨 말 "저 어디까지 가세요?
때마침 저와 같은 쪽이네요 우산 하나로 걸어갈까요?"
하늘이 너무 아름다워 파란 보랏빛 꿈결 같은 기분이야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을까 아름다운 그녀 오! 세상은
아름다워 그래 그래서 다들 살아가나 봐 저 하늘이 날
도운 거야 꿈이 아니길 바래
신승훈의 오늘같이 이런 창밖이 좋아
오늘 같이 이런 창밖이 좋아 비가 오니까
찻집 유리창에 팔을 기대고 기다리네 그대를
우산도 없이 뛰어올 거야(그대)
젖은 얼굴 닦아줘야지
아니야 그대는 안 올지도 몰라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오늘 같이 이런 창밖이 좋아 슬프기는 하지만
창밖을 보며 편지를 써야지 비가 내린다고
윤하 우산
어느새 빗물이 내 발목에 고이고
참았던 눈물이 내 눈가에 고이고
지겹도록 들어도 지겹지 않은 이유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비 오는 걸 좋아해? 고등학교 때 친구가 물었었는데, 딱히 콕 짚어 말할 수 없었다. "그냥 좋아."
친구들은 종종 비가 오는 날이면 내가 생각난다고 할 정도로 나는 비를 좋아했다.
빗소리도 좋고, 비 오는 날 장화를 신고 물이 고인 웅덩이들을 참방거리는 느낌도 좋고, 무엇보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그 소리가, 아니 그 소리보다 그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우산 속에서는 유난히 크게 느껴지는 비의 무게가 궁금해서 우산을 살짝 내려보기도 했던.
내 기억에 비가 오는 날은 평범한 하루이기보다 늘 특별한 하루였다.
비를 좋아하지만 나는 혼자서 비를 조용히 감상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언제나 친구들을 불러내거나 친구들이 나를 불러내거나. 비 오는 날은 다들 바깥활동을 싫어한다던데 우리는 그 반대였다.
그리고 그 아련한 기억들 속에 한 사람이 있다.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한눈에 반해버렸던 대학생 오빠.
그 오빠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커피숍에 처음 간 날도 비가 오는 날이었고, 의도적으로 틀어놓은 듯한 노래는 신승훈의 '오늘같이 이런 창밖이 좋아'였다. 드라마 응팔시리즈처럼 나도 열심히 왔다 갔다 하며 일을 하는 그 오빠를 보기 위해 그 카페를 한동안 들락거렸고, 혼자 가슴앓이를 오랫동안 했던 것 같다.
조카가 태어났을 때 동생네와 엄마가 조카이름을 지었는데, 그 오빠의 이름과 똑같아서 몇 십 년이 지났음에도 피식 웃음이 났던 기억이 난다.
대학교 때는 자취방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머리에 노란 물을 들이겠다며 머리카락에 잔뜩 염색약을 서로 발라주고, 랩을 뒤집어쓴 채 맥주를 마시다가 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에 "야, 비 온다!!" 하고 우리는 모두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야말로 우산도 없이 염색물을 뚝뚝 흘리면서 까르르거렸다. 한창 유행이었던 야타족이 그 와중에도 우리에게 '야타'를 외쳐대던 그때. 염색약으로 얼룩덜룩해진 머리에도 콧대 높은 여자처럼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던 그때. 그게 젊음이겠지. 새삼 부럽네.
비 오는 날의 에피소드는 비가 오지 않는 날보다 더 많다.
나의 청춘은 비 오는 날 더 반짝였던 듯하다.
하지만 이제 나는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지극히 보통의 하루를 산다.
집에 있는 창을 전부 다 열어두고, 혹여 비바람이 치면 창가 주변의 것들이 젖지 않을 만큼의 수건을 몇 장씩 깔아 두고서라도 창문을 열어둔다. (태풍이나 여름비는 안 그런다 ㅎㅎ)
그렇게 온 문을 열어젖혀야 마치 빗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처럼.
빗소리를 들으며 맥주를 마시거나,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또 읽는다.
읽다가 지루하면 쓰기를 하고, 쓸 것이 생각나지 않으면 베껴쓰기를 하면서 조용하고 아주 평범한 하루를 보낸다.
더 이상 비 오는 날은 특별함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해도, 나에게 비 오는 날은 내 젊은 날의 회상이기도 하고, 현재의 평온함이기도 하다.
가끔은 그때처럼 우산을 쓰고 일부러 나가보기도 한다. 오늘은 어떤 우산을 쓸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나도 빨간 우산을 펼쳐든다. (나처럼 우산이 많은 사람도 드물것이다. 옷 쇼핑을 하듯 우산 쇼핑을 좋아한다)
여전히 우산 속에서 느끼는 비의 무게는 굉장하다. 이런 것이 보통의 하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