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제 방한화를 샀다.
백화점엘 갔다.
아웃도어 매장을 둘러보았다.
눈길에 미끄러지지 않을 방한화를 사기 위해서.
집에 신발이 많다. 옷 욕심만큼이나 신발 욕심도 많았다.
나는 예쁜 것을 참 좋아한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신발 박스를 정리하는 일도 큰일에 속한다.
몇 년째 신발을 버리기 시작했더니 박스의 개수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정리를 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도대체 이런 신발을 어떻게 신고 다녔지? 싶은 신발들이 많았다.
킬힐들은 이제 남아있지 않다. 그건 남은 생을 거꾸로 살지 않는 한 절대 신지 못할 것이다.
8센티 굽이 가장 많았다. 어쩌다 디자인이 유니크한 12센티 힐도 여럿 있었다.
12센티는 고사하고 이젠 8센티도 힘들다.
부츠를 신어보았다.
무릎까지 오는 롱부츠도 여러 개, 앵클부츠는 더 여러 개, 하프부츠도 여러 개.
어떤 부츠는 종아리에서 지퍼가 걸린다. 에잇, 못 신겠네.
어떤 부츠는 발이 아프다. 사이즈가 작은 느낌이다. 신발이 줄었나 내 발에 살이 쪘나.. 에잇, 못 신겠네.
또 어떤 부츠는 신자마자 발이 시리다. 왜 가죽 부츠는 비싼 거지? 발도 시린데.. 에잇, 못 신겠다.
그렇게 일일이 신어보니 신을 만한 게 단 한 개도 남아있지 않는다.
어그부츠 몇 개는 눈이 오는 날 쥐약이다. 왜 그렇게 또 미끄러운 건지..
귀엽고 퐁신퐁신한데 눈 온 다음엔 젖기도 잘하고, 미끄럽기도 잘한다.
작년에 여기는 눈이 안 왔다.
쌓일 정도의 눈을 단 한 번도 못 봤다. 그래서 아들의 눈썰매는 옥상에서 마른바람만 맞고 있었다.
올해는 12월인데 벌써 두 번이나 눈이 왔다. 제법 쌓여서 벌써 눈썰매를 타고 왔다.
아무래도 올해는 눈이 자주, 많이 올 것 같다.
눈이 안 와서 부츠가 필요 없었던 작년과는 다르게 준비를 해야겠다.
백화점을 갔다. 부츠를 사러.
어그는 있으니 어그 매장은 패스.
여전히 굽이 있는 롱부츠들이 나를 유혹했으나, 1초 만에 눈길을 돌린다.
이미 내 몸이 편하고 따뜻하고 안 미끄러지는 신발을 원하고 있었다.
발길이 저절로 아웃도어 매장 쪽으로 향한다.
네파는 전지현 님이 신은 예쁜 방한화가 있을 거라며 갔는데, 지방 백화점이라 그런 거니? 물건이 없다.
K2는 딱 봐도 등산화 같이 생긴 것들만 있다.
데쌍트는 브랜드 자체를 싫어해서 들어가지도 않고 패스 한다.
코오롱도 부츠다운 신발이 없다, 블랙야크는 발목이 추울 것 같다. 아이더에도 내가 찾는 신발이 없다.
남편이랑 둘이 돌고 또 돌면서 아~~ 신발 하나 사는 데 뭐가 이리 힘들어.
남편이 드디어 찾아준다. "여보 저건 어때?"
노스페이스에 시커먼 부츠가 나열되어 있다. 발목 위로 올라오는 길이에 패딩으로 퐁신퐁신, 안감은 죄다 터래기로 따셔보인다.
바닥은 아웃도어 초보자인 내 눈으로 봐서는 모르겠지만 아웃도어 브랜드니 패션 브랜드 보다야 기능성이겠지 싶다.
전지현이 신으면 예뻤을까?
어째 내가 신으니 영 나이만 들어 보인다.
아무리 편하고 기능적인 신발을 찾고 있지만, 이게 최선일까? 선뜻 맘에 와닿지 않는다.
조용히 신발을 내려놓고 매장을 나왔다.
조금 더 예쁜 거 없을까? 아무리 그래도 저건 산속에서나 신어야 할 것 같지 않아?
다시 한 바퀴를 돈다. 없다.
그냥 네가 최선이었구나 하며 다시 노스페이스로 들어간다.
사이즈를 말하니 다 떨어졌다고 주문해야 한단다. 일주일 소요된다고.
뭐야, 맘에 썩 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사는 건데 너 인기 많구나?
내가 너를 주문하고 기다리면서 까지 신어야 하는 처지라는 게 슬프지만 인정할 수밖에.
그래, 나 이제 예쁜 부츠는 못 신겠어.
어쨌거나 주문을 하고 나왔다.
나는 내가 이렇게 될 줄 정말 단 한 번도!!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었다고 편한 신발만 찾게 될 줄, 디자인이고 뭐고 편한 게 장땡이라는 타인들의 말에 공감하게 될 줄.
나는 나이가 들어도 항상 예쁘게 꾸밀 거라고, 멋쟁이 할머니가 될 거라고 늘 생각했다.
'너라면 그럴 것이다'라는 말도 많이 들었는데 모두의 예상을 엎어버리는 내가 조금은 안타깝다.
각자의 멋이 있겠지만 나에게 멋이란 가능한 어떤 것이었다.
'너니까 이게 어울리지, 너라서 이게 가능해' 이런 스타일의 멋 내기를 좋아했는데, 이제는 멋이고 나발이고 세상 편한 게 제일 좋다.
편해서 긴장감이 떨어지면 늙는다는데... 난 지금 늙고 있나 보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나이 든 여배우들이 여전히 킬힐을 신는다.
진짜 대단한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와 저거 어떻게 신지? 발도 아프고 허리도 아플 텐데...
이런 늙으니 같은 소리만 하고 앉았다.
운동을 해야겠다. 운동만이 살길이다.
운동해서 건강한 몸을 만들어야겠다.
그러면 60에도 킬힐은 못돼도 6센티 힐은 신을 수 있을 것이다.
힐도 신어 버릇해야 신을 수 있다.
그래도 신던 가락이 있으니 몸을 만들면 신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새로 산 방한화를 신고 열심히 눈길을 걸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