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의 공간은 흔들리고 있었다.
도유사의 붓끝에서 흘러나온 결이 마침내 허무의 중심부에 닿았다.
그것은 마치, 아무것도 없던 어둠 속에 처음으로 불이 켜지는 순간과 같았다.
찰나의 정적, 그리고 그 정적 뒤에 밀려온 폭발적인 반동.
허무는 고통을 느끼는 듯 몸체를 일그러뜨렸다.
그 실체 없는 존재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러나 세계의 결이 요동쳤다.
정신체만이 감지할 수 있는, 이름 없는 진동.
무형의 진동이 정신의 살을 찢고 영혼을 흔들었다.
도유사의 공력은 이미 한계에 이르렀고,
붓은 손에서 부서질 듯 떨리고 있었다.
더 이상 육신이 버티지 못하고 있었다.
도유사의 정신체가 잠시 흐릿해졌다.
그러나 그는 붓을 놓지 않았다.
그것이 예악을 지키는 마지막 붓이었고,
그 붓으로 세계의 틈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허무의 진동 속으로 세 천녀가 다가왔다.
연남해는 붉은 피리에서 숨을 불어넣었고,
아라하는 손끝으로 비파의 줄을 울렸다.
나함사는 두 손으로 북을 감싸며 그 안에 자신의 기운을 실었다.
그녀들은 자신의 공력으로 도유사의 정신체를 밝게 비추었다.
"선비여, 스스로 희생하여 삼계를 지키니 존자로구나.”
도유사가 고하였다.
”천녀들이시여, 제 공력이 다하여 끝맺음을 의탁하고자 합니다."
세 천녀의 음성이 율려처럼 공간에 울렸다.
"선재, 선재로다"
세 천녀는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정신체로 이루어진 그 손은 빛으로 엮였고,
세 갈래의 기운은 하나로 합쳐졌다.
마치 새벽녘 하늘을 뚫고 올라오는 첫 빛줄기처럼,
그들의 존재는 허무의 심장으로 곧장 향했다.
도유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만류하려는 순간 세 천녀의 광휘는 허무의 중심에 폭사되어 나갔다.
그 순간 허무가 크게 뒤틀렸다.
공간이 무너지고, 시간의 선이 휘어졌다.
세상 모든 존재의 이름이 한순간 흐릿해지는 느낌.
그것이 허무의 반작용이었다.
그 순간, 세 천녀의 형체는 찬란한 광채를 남기며 산화했다.
도유사의 붓끝에서 번지던 결만이 가늘게 허공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고요해졌다.
도유사는 마침내 붓을 놓았다.
그의 정신체가 점점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본체는 이미 숨이 끊겼고,
세 천녀가 비추어 준 공력만이 그의 존재를 붙들고 있었다.
허무의 공간은 마치 거대한 태초의 자궁처럼 고요해졌다.
흔들림이 멎었고, 결계의 선은 다시 안정되었다.
허무는 더 이상 발화하지 않았고,
그 중심은 마치 모든 것을 태우고 사라진 별처럼 침묵하고 있었다.
현옥은 세 천녀를 따라 시공을 건너왔다.
그러나 이미 세 천녀는 산화한 뒤였다.
도유사의 정신체도 마치 한 점 남은 별빛처럼 희미했다.
그의 형상은 바람결처럼 가늘어졌고,
붓을 쥔 손조차 이제는 빛의 실루엣에 불과했다.
현옥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스승님!"
그 무형의 존재가 마지막으로 남긴 것은—말이었다.
“현옥아…”
그의 음성은 물결처럼 부드럽고, 동시에 칼날처럼 명징했다.
소멸 직전의 정신이, 온 존재의 마지막 울림을 실어 보내고 있었다.
“심종의 숨결을 이어지게 하라.”
현옥은 눈을 감고 그의 말을 들었다.
그 목소리는 말이기 전에 기도였고, 유언이기 전에 가르침이었다.
그의 정신이 점점 더 투명해졌다.
눈, 코, 입의 형상이 사라지고,
붓을 쥔 손만이 남았다.
그 손은 허공을 가리켰다.
그는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입술은 보이지 않았지만,
언어는 심장의 안쪽으로 도달했다.
“심종이 너와 함께 흐르리라.”
그 순간, 그의 붓이 흩어졌다.
붓의 심이 빛으로 화하여 그 결은 바람이 되어,
현옥의 뺨을 타고 흘렀다.
현옥은, 아니 이제는 사라연은,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바닥에 이마를 대고, 한없이 엎드려 있었다
현옥은 처음 알았다.
정신체도 눈물을 흘리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