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이 건네준 사랑
여름방학이면 나는 외갓집보다 이모 집에 머무는 일이 많았다. 새벽이면 갯벌이 숨을 쉬고, 들판엔 햇살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버스에서 내려 청포도밭을 지나면, 마을은 말을 줄이고 풍경은 발걸음을 늦추었다. 바람엔 푸른 과일 냄새가 스며 있었다. 마당 오른쪽에는 장독대가 줄지어 서 있었고, 그 뒤로 큰 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그늘 아래서 하늘수박 넝쿨이 조용히 기어올라 손바닥만 한 초록 열매를 잎사귀마다 매달았다. 먹을 수는 없었지만 꽃은 피었다. 노란 별처럼, 담장을 타고 넘던 여름 하늘의 조각들 같았다.
그 나무 아래, 길게 뻗은 더듬이가 잎사귀를 더듬었다. 초록빛 등딱지는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이모는 웃으며 말했다. “저거, 하늘소야. 천연기념물이야.” 나는 두려움보다 신비로움을 먼저 느꼈다.
담장 너머엔 소년이 있었다. 조개껍질 박힌 낮은 돌담은 달빛에 닿으면 흰 조개껍질이 반짝였다. 넝쿨은 경계를 모른 듯 꽃을 피웠다. 소년의 집 마당에는 떽가위(거위)가 있었다. 꽥꽥 소리를 내며 날개를 퍼덕이고, 사람을 쫓아다니다가 덥석 물곤 했다. 누구도 그 마당을 마음 놓고 건널 수 없었다. 그 떽가위는 우리 사이를 지키는 수문장 같았다. 말은 없었지만, 스쳐간 눈빛 하나는 지금도 또렷하다.
새벽이면 이모는 남해포로 나갔다. 맛조개와 미를 한가득 들고 돌아왔다. 맨물에 데친 조개는 바다의 짠내를 머금었고, 미무침은 오도독 씹히며 여름 바다를 통째로 담았다. 장독대 봉선화 옆 모시풀로 만든 모시찰떡은 쫄깃한 질감 속에 이모의 손길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떡이 아니라, 여름을 건네주던 사랑의 증표였다.
그 여름, 모든 풍경은 말이 아닌 삶으로 기억되었다. 지금도 무언가 쓸쓸하거나 그리운 날이면 나는 문득 이모 집 장독대 뒤가 그립다. 하늘수박, 하늘소, 소년과 떽가위, 맛조개와 미무침, 모시찰떡, 김이 피어오르던 부엌, 그리고 눈물 훔치며 말없이 등을 돌리던 이모의 뒷모습. 정 많은 이모의 손길은 끝내 말로 전해지지 않았지만, 그 여름 모든 것을 건네주었다. 그래서 여름이면 여전히 내 마음 저편에 이모 집이 머물고 있다.
돌아가는 날, 이모는 “맛있는 거 하나 못해줘서 미안해.”라고 말하며 소매로 눈시울을 훔쳤다. 그러나 나에겐 이미 모든 것이 맛있었다. 바다와 들판, 장독대와 부엌, 그리고 이모의 손길이 그 여름을 온통 채워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그 여름, 이모도, 소년도, 하늘수박도, 떽가위도, 모시찰떡도 침묵했지만, 그 침묵이 오히려 내 마음에 가장 오래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