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호지 위에 피어난 말
발코니 난간 위로 인동초가 뻗어 있다. 그 너머로는 승학산이, 그 아래로는 높은 교회 십자가, 학교 지붕, 도로를 달리는 차량, 골목길을 오르는 할머니까지, 관교동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치 한 마리 새가 되어 날고 있는 느낌이다.
몇 해 전,
동생에게 선물 받은 ‘겨울을 이겨낸 풀’ 인동초(忍冬草) 두 그루.
겨울을 이겨낸 풀은 햇빛과 바람이 풍부한 9층 발코니에서 잘 자라고 있다. 6월부터 피기 시작한 꽃은 피고 지기를 반복하며 가지를 키웠고, 가장 윗가지 하나를 자르자 옆에서 새로운 가지가 돋고 꽃도 잎도 더 풍성해졌다.
인동꽃은 처음엔 하얀 봉오리로 피어난다. 시간이 지나면 연한 노란빛으로 물들고, 마침내 노란 꽃으로 활짝 핀다. 영어 이름은 honeysuckle, ‘꿀을 빠는 꽃’. 여름이면 벌새가 찾아와 꽃잎을 훑고 간다. 가끔은 작은 새들도 쉬어간다.
손을 댄 것 같지 않은 인동 넝쿨이 나는 좋다. 넝쿨 사이로 얼굴을 반쯤 내민 꽃잎은 수줍은 소녀처럼 보인다. 길고 끝부분이 새 깃털처럼 갈라진 그 꽃잎은, 날아오르는 학처럼 고요하게 매혹적이다. 꽃잎이 벌어지기 전 채취한 꽃을 모아 서너 번 차로 우려먹을 양을 만들었다.
비 내리는 창가에 앉아 커피 대신 인동꽃차를 마신다. 그 어떤 향수보다 진한 인동향이 찻잔 속에서 피어난다. 매혹적인 꽃잎과 강인한 생명력은, 할머니를 닮았다.
나도 모르게 10살 소녀가 되어, 인동초를 처음 만났던 그 여름날로 돌아간다. 싸리문 앞에서 먼저 반겨온 건 할머니보다 인동꽃의 향기였다. 인동초 아래 깊게 판 굴은 김치, 고구마, 감자, 무, 배추가 있는 자연 냉장고다. 냉장고를 열면 냉장고 안까지 인동꽃 향이 그윽했다. 향을 따라 마당 안쪽으로 봉숭아가 피어 있는 작은 장독대가 있고, 그 옆 나무 부엌문 사이로 할머니가 계셨다.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잔불에 고등어를 굽고 계셨고, 시원한 우물물에 귀한 설탕을 풀어 달콤한 미숫가루를 타주셨다. 저녁밥은 마당 멍석 위에서 먹었다. 모깃불에 눈물을 흘리며 먹던 수박, 모깃불이 피어오르면 송아지도 싫은지 ‘음매, 음매’ 하고 울었다. 인동꽃 향과 별빛, 그리고 할머니와 함께했던 여름밤이었다.
외동딸로 자라 손에 물 하나 묻히지 않았던 고운 분이었다. 오뚝한 콧날과 뚜렷한 쌍꺼풀, 매무새도 반듯했던 미인이었다. 할머니보다 3살 어린 남편인 할아버지는 일정한 직사(職事)가 없는 말단 양반 한량이었다. 예쁘고 고왔던 할머니는 그렇게 외롭고 가난한 삶을 살았다. 40대에 혼자된 할머니는 4남매를 키워내셨다.
80이 넘은 나이에도 속옷은 손수 손빨래하시던 할머니. 육 남매를 키우느라 늘 바쁜 엄마를 도와 걸레나 빗자루로 청소하는 모습은 본 적 없었다. 막냇동생이 스카이콩콩을 타다 다쳤을 때도
“피야, 어미야, 피...” 하며 발만 동동 구르셨다.
도시생활 속의 할머니는 시골집의 인동꽃 향기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효심과 엄마의 정성 속에서도 할머니의 웃는 얼굴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아버지가 드린 용돈은 쓰지 않고 모아두셨다. 그 돈으로 할머니는 아무것도 사지 않으셨다. 고쟁이 속에 차곡차곡 지폐를 접어 넣던 손길. 그 돈은 결국 큰아버지 손에 꼭 쥐어졌다. 그 손은, 나의 손을 따뜻하게 잡은 적 없었다. 나와 동생들에게 무언가를 주신 기억도 없다. 그래서일까, 어린 마음엔 서운함이 남았던 것도 같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할머니는 그 좁은 방 안에서도 늘 ‘어른’이었다.
자식들 모두에게는 다 주지 못해도, 누군가 하나에게라도 더 도와주려 했던 마음이었을지 모른다. 그 마음이 늘 큰아버지 쪽을 향했던 것뿐이다.
크게 말하지 않았지만, 그분은 늘 무거운 마음으로 침묵을 지키고 계셨던 듯하다. 할머니는 마루에 앉아 하루를 보내셨다. 한쪽 무릎을 세운 채, 두 손을 포개고 창밖을 바라보셨다. 늘 같은 자세, 같은 침묵. 표정으로 할머니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우리 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어느 날, 굴러다니던 붉은 색종이를 접어 가위로 자르고 계셨다. 그 종이에 할머니의 손이 닿자 꽃잎이 생겨났다. 종이가 끊기지 않게 오리는 손길은 마치 춤을 추는 듯했다.
“또 만들어줘요!” 보챘고, 그때마다 붉은 꽃잎이 더해졌다.
우리는 그것을 할머니 방 창호지 위에 붙였다.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만 같은 꽃잎.
나중에 알았다. 그 종이꽃이 중국 대중예술 ‘전지 공예’라는 걸. 가위질 한 번으로 완성하는 ‘전도전’, 창호지에 붙이는 그것을 ‘창화’라고 부른다는 것도. 그날의 할머니는 조용했지만 창의로 가득 찬 스승이셨다. 삶은 말 없이도 더 많은 걸 가르칠 수 있음을 보여주셨다.
내가 20살이 되던 해, 여든둘 된 할머니는 더는 마루에 나오지 않으셨다. 3일 동안 미음만 드시고 누워 계셨다. 고모들이 모였고, 아버지는 말없이 막걸리를 드시고 들어오셨다. 언제나 사 오시던 홍시도 더는 사 오지 않았다.
외롭고 한 많은 삶을 홀로 당신 마음속에 삭히고 사셨던 우리 할머니,
아무도 살지 않는 할머니 집에 지금쯤 인동초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겠지.
굽이굽이 꼬여 자란 인동 넝쿨 사이, 바람에 흔들리며 찻잔 위로 내려앉은 그 꽃잎은 마치 할머니의 마음 한 조각 같다.
말없이 내게 전해지던 할머니의 삶과 강인함이 창호지 위에 피어난 붉은 꽃잎처럼 할머니의 마음이 인동꽃차 속에 고요히 우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