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옷 Feb 25. 2024

승아의 저녁

4화

승아가 야군의 특별한 능력을 알게 된 것은  회사에 입사하고 6개월쯤 지난 때였다. 처음에는 승아 본인의 능력이라고 생각했지만, 영보, 멍군, 육이 주위의 다른 다양한 생명체로 실험해 본 결과 오직 야군에게서만 느껴졌기에 승아는 이것을 야군의 특별한 능력이라고 믿게 되었다. 여느 날처럼 아침에 일어나 야군을 안고 밤새 별일 없는지 확인하던 그때였다.


[늘은 그간의 노력이 빛 발하게 되므로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 걱정하지 말 것]

  

갑자기 이게 뭔 소리야. 들린다고 하기엔 방안이 너무 조용했기 때문에 느껴진다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승아는 야군의 앞 발을 붙들고 있는 동안 점쟁이의 운세풀이 같은 문장이 명확하게 느껴졌다. 어떤 날은 추상적이고 어떤 날은 구체적이었지만 그 내용이 정확하게 승아에게 인식되었다. 혹시 심심풀이로 본 이달의 별자리 운세에서 읽은 내용들을 혼자 생각하는 건가 싶었지만 승아가 들어보지도 못한 단어가 느껴져 국어사전에 뜻을 찾아볼 때도 있었다. 하루이틀 지날수록 야군이 주는 느낌이 현실과 들어맞다 보니 처음엔 호기심에 잡아보던 앞발을 이제는 진짜 점보는 심정으로 아침마다 진지하게 잡고 있다.


처음으로 야군 점이 느껴진 날에는 회사에서 갑작스레 사원 한 명이 그만두는 바람에 중요한 업무의 일부가 승아에게 배정되었. 괜한 일이 늘었네. 다소 곤혹스러운 마음으로 전임자의 자료를 살펴보다가 승아는 작지만 중대한 오류를 발견하게 되고, 선배에게 그 사실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선배의 조언에 따리 부장에게 직접 첫 보고를 하게 되었다. 일이 커질까 걱정도 됐지만 전임자의 실수가 손해로 이어지지 않은 시점에 미리 발견한 것이었기에 누구의 잘잘못을 따질 필요 없이 자인 승아가 실수를 바로잡는 몇 가지 일들만 추가로 하면 충분하였다. 그부터 승아는 부원들이 조금 더 본인을 지켜보는 느낌 받았고, 프로젝트의 중요한 일 몇 가지에 대해서도 내용을 공유하고 함께 논의하는 사람이 되어갔다.


'역시 야군 점은 한마디도 쉬이 넘길 수 없다니까. 좀 명확하게 어서 알려주면 더 좋겠지만, 그건 너무 큰 욕심이겠지. 오늘은 우리 야군 줄 츄르라도 사가야지.'


새삼 야군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며 책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승아의 개인 휴대폰으로 진대리가 보낸 자메시지가 왔다.


[승아 씨. 괜찮으시면 □□역 앞 스타벅스 가실 래요?]

[네, 좋아요. 6시 5분에 1층에서 만나 같이 이동하시죠.]


문자메시지 확인 즉시 답을 남긴 승아는 시계를 확인한 후 가방을 챙겼다. 잠시 뒤 1층에서 만난 승아와 진대리는 승아의 집과 진대리의 집의 중간쯤에 있는 □□역으로 함께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다.


"제가 갑자기 커피 같이 마시자고 말씀드려서 혹시 놀라셨나요?"


따뜻한 디카페인 라떼를 승아에게 건네며 진대리가 물었다.


"조금은요. 후훗. 저 남자친구 있는 건 아시지요?"

"물론이죠. 사실은 어제 승아 씨네 부서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승아 씨 책상을 봤거든요. 근데 승아 씨 모니터에 빨간 나비넥타이 스티커가 붙어 있더라고요. 그거 보고 용기 내서 여쭤본 거예요. 그거 목소리 변조 넥타이 맞죠?"

"우와, 진대리님.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혹시 추리덕후?"

"덕후까지는 못되지만 그래도 추리물은 웬만하면 거의 다 좋아해요. 최근에 셜록 시즌 5 나온다는 소문 듣고 시즌 1부터 정주행 중이에요."

"저는 셜록은 시즌 초반이 제일 재밌더라고요. 시즌 4에서는 좀 캐붕이었던 것 같고. 히가시노 게이고도 좋아하세요?"

"책을 다 읽은 건 아닌데 영화는 일본 것도 한국 것도 좋아해요."

"저희 집에 책 다 있거든요. 보고 싶은 책 알려 주시면 빌려드릴게요."


승아는 진대리의 입에서 코난의 넥타이 이야기가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 음으로 둘이서만 커피를 마시는 자리라 어색하면 어쩌나 했는데 한번 대화의 물꼬가 트이자 둘은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한 자리에서 두 시간이나 떠들었다.


"저는 추리물은 좋아하지만 추리는 잘 못해요. 남자친구가 한 거짓말을 하나도 못 알아채겠더라고요."

"남자친구가 무슨 거짓말을 하는데요?"

"고양이를 좋아한다고 해놓고 사실은 개를 좋아한다거나, 술을 잘 못 마신다고 해놓고 사실은 소믈리에  자격증이 있다거나 하는 것들이요."

"그건 딱히 거짓말이 아니라서 그런 거 아니에요? 고양이랑 개 둘 다 좋아하고, 와인을 좋아하지만 알콜이 잘 안 받는 체질일 수도 있고요. 그럼 거짓말은 아닌 거 같은데."

"그런가요? 저는 뭔가 속은 느낌 같았거든요. 대리님이 저 보다 더 논리적이신 분 같네요. 진록 대리님."


진대리는 애초에 승아와 남자친구 사이에 끼어들 마음은 별로 없었지만, 연인 사이 거짓말에 대한 불만이 고작 이런  것뿐인 관계라면 둘 사이 끼어들 틈은 1mm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다. 승아는 개인사에 대한 이야기를 비밀로 하는 것엔 크게 재주가 없었다. 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걸 싫어하다 보니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본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 이야기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선이 있었다. 그 선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만 질문을 받고 대답하였으며 선을 넘는 경우 자연스럽지만 단호하게 피할 줄 알았기에 회사에서 개인사를 공유해도 사생활을 침해당한다는 느낌 받지 않다.


"승아 씨, 오늘 고마웠어요. 앞으로 종종 이런 이야기 같이해도 될까요. 제 주위에는 추리물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서요."

"물론이에요, 대리님. 저도 마찬가지예요. 라임씬 새 시즌 오픈하면 후기 공유하시죠. 잘 들어가세요."


승아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새로 알게 되어 반가웠다. 그 사람이 회사에서 젠틀하기로 유명한 진대리라서 더 좋았다. 좋은 취미 메이트를 만나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 모르는 사람과의 모임 참여에 도전할 만큼 취미 메이트가 간절한 건 아니라서 혼자서 책을 읽고, 영상을 보며 살아왔다. 그런데 오늘 진대리와 추리에 대해 이것저것 떠들다 보니 역시 마음 맞는 취미 메이트가 있는 것은 취미생활 두 배, 세 배로 풍요로워지는 길 같았다.


'아무래도 재계약 해야겠다.'


인생의 기로에서 하는 중요한 선택을 아주 사소한 이유로 결정하게 되는 게 인간의 귀여운 점이 아닐까. 스멀스멀 올라오는 일상의 지겨움에 이직을 고려했지만 앞으로 당분간은 새로운 취미 메이트와의 재밌는 추리 생활이 이어질 것 같으니까, 무엇보다 이거다 하는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승아는 부장이 뭐라든 이번 재계약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5화에 계속 -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승아의 오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