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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옷 Mar 11. 2024

승아의 봄 1

5화

"재계약은 잘했어?"

"응, 부서이동은 절대 안 된다고 해서 그냥 무리하지 않고 연봉만 조금 올려서 계약했어."

"저번에 너네 부장님도 좋으신 분 같다고 했잖아. 잘 됐네."

"그치, 계약기간도 1년으로 했어. 1년 뒤에 어떤 마음일지 몰라서."

"응, 그랬구나."

"이제 날씨도 점점 풀리는데 다시 캠핑 고?"

"아직 침낭은 챙겨야겠지만. 너만 좋다면 고."

"그럼 이번 주말엔 우리 제일 처음 캠핑했던 그리로 가볼까?"

"좋아, 내가 예약해 놓을게."


승아는 재계약 만료기간을 한 달 앞두고 최종 재계약 서류에 서명했다. 재계약을 해야겠다고 결정했을 때 예의상 부장에게 먼저 의견을 전달하였다.


"부장님. 저번에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일단 이번에는 재계약하려고요.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요."

"그렇게 결정했군. 대신 가능한 한 계약기간을 짧게 하고 그동안 정규직 자리를 열심히 찾아보는 건 어떤가. 내가 아까워서 하는 말이야."

"네, 저도 가능하다면 1년 단위로 계약하고 싶습니다. 인사팀에 문의해 볼게요."


부장은 승아의 결정을 존중하면서도 그 이유를 캐묻지 않았다. 개인적인 사정이라 말했으니 아마도 돈 문제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다시 취업 준비를 할 만큼의 목돈은 없는 것이겠지. 부장이 아무리 승아를 아끼더라도 돈까지 지원해 줄 일은 아니었기에 그저 승아에게 도움 될 만한 의견을 덧붙이며 본인의 아쉬움을 한 번 더 전할 뿐이었다.


승아는 재계약을 한 이후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미리 마음의 결정을 했으면서도 최종 결정은 미룰 수 있는 만큼 미루었다. 그동안 승아의 마음속에는 '나 현실에 안주하려는 건가, 더 나은 길이 있는데 못 찾고 있는 건가' 하는 의심이 계속 피어났다.


"야군. 이번엔 제발 재계약 해라, 재계약 하지 마라, 이렇게 똑 부러지게 좀 알려주면 안 될까? 제발 부탁 좀 할게."


승아는 애원하는 심정으로 야군을 끌어안고 앞발을 잡아보았지만 늘 명확하지 않은 문장들만 느껴질 뿐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잘 들여다 보고 마음이 하자는 대로 하면 손해는 없을 것]


아, 그러니까 그놈의 마음이 어떤 건지 잘 모르겠다고. 승아는 애꿎은 야군의 볼을 늘어지게 잡아당기고는 잡은 손을 놓아주었다. 지금의 마음은 어떠한가. 적응된 업무, 믿어주는 상사, 만족하는 연봉, 좋은 취미 메이트, 안정적인 연애 생활. 승아는 이 모든 걸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변화보다는 유지. 젊은이의 빛나는 청춘이구나, 하는 느낌은 없지만 그저 당분간만이라도 예측 가능한 기간을 보장받고 싶었다. 승아는 대학졸업 후 계약직으로만 커리어를 쌓으며 일상이 통째로 바뀌는 경험을 종종 했다. 그때는 그게 좋았는데 지금은 이렇게 시라도 일상을 유지하는 선택을 하고 싶었다. 일 년 후엔 어찌 될지 모르겠지만 당장은 이 평화를 깨뜨려가며 취업 준비를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야군. 지금 이게 내 마음 맞지? 우물 안 개구리처럼 발전 없는 인생이라고 비웃는 건 아니지?"


야군이 뭐라 생각하든 무슨 상관인가. 다른 사람들이 비웃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말이다. 사실 승아를 비웃을 만큼 시간과 생각의 여유가 있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그 시간에 오늘 저녁에 뭐 먹을지를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그한숨과도 같이 뱉음과 동시에 공기 중으로 사라져 버 남들의 얕은 비웃음 때문에 본인의 생각을 계속 의심하고 점검하지 말자고 승아는 다짐했다. 하지만 혹시나 그 비웃음을 짓는 사람이 다름 아닌 승아 본인일까 봐 그 점이 계속 걱정되었다. 하지만 이제 계약서에는 승아의 서명이 새겨졌다. 걱정을 하든 의심을 하든 앞으로 1년 동안 승아의 일상은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변함없음에 대한 새로운 결정. 승아는 이것으로 봄이 왔음을 실감했다. 승아는 영보, 멍군과 함께 가는 캠핑에서 자유로움을 느꼈다. 자연이 내는 소리를 들으며 텐트를 치고, 밥을 짓고, 주위를 걷는 것이 좋았다. 여기서는 승아가 하고 싶은 것들이 단순했고 그래서 결정도 쉬웠다. 하고 싶은 걸 그냥 하면 되었다. 경치 좋은 곳에서 의자에 앉고 싶으면 앉으면 되었고, 텐트에 눕고 싶으면 누우면 되었다. 그러려고 오는 곳이니까. 월월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보 멍군이 옆 텐트 강아지와 함께 봄꽃 주위를 돌며 신나게 뛰어놀고 있었다.


"저기 성질 급한 꽃들이 벌써 피었네. 쟤네도 봄이 오길 겨우내 기다렸나 보지?"

"자기도 봄이 오길 기다렸어?"

"그럼, 난 추위엔 젬병이니까."

"봄 되면 멍군이 산책도 같이 다니자. 사진도 많이 찍고."

"벚꽃축제 같은 델 가려는 건 아니지?"

"아냐 아냐, 그냥 봄을 즐기자는 거지. 우리만의 방식으로."

"그래, 그러자."    


승아는 눈을 감고 고개를 들다. 밝은 빛이 얼굴을 확 덮는 느낌이 났지만 눈앞은 깜깜했다. 계곡 물 흐르는 소리와 여러 종류의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한숨 자고 나서 저녁을 해 먹을 생각이다.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 아직은 바람이 좀 쌀쌀했지만 햇살은 따뜻했다. 승아는 주말을 푹 쉬어야 다음 한 주를 살아갈 에너지가 충전되었다. 푹 쉰다는 건 몸과 마음을 모두 포함한 일이었다. 승아는 전자책 앱을 켜서 추리소설 한 권을 음성 모드로 설정해 두었다. 캠핑장 곳곳에는 음악을 듣는 사람, 장작을 피우는 사람, 맥주를 마시는 사람, 저마다의 방식으로 충전 중인 사람들이 있었다. 주중에는 휑하지만 주말에는 거대한 충전기로 변신하는 봄날의 캠핑장이 많은 사람의 숨통을 트게 했다.  



- 6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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