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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옷 Oct 08. 2024

승아의 여름 - 2

7화

날씨가 조금씩 더워질수록 승아의 옷차림도 점점 얇아졌다. 회사에서야 에어컨이 쌩쌩 돌아가는 터라 셔츠에 카디건까지 걸쳐야 했지만, 문 밖으로 나서자마자 훅 덥혀진 공기가 덮쳐 오기에 외출이 잦은 휴일엔 늘 시원한 원피스 차림이었다.


"오늘은 뭘 할까?"

"우리 방탈출 카페 가볼래? 저번에 회사 회식 끝나고 직원들이랑 방탈출 카페 갔는데 재미있었어."

"나 추리물은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알잖아."

"방탈출 카페는 추리만 하는 곳 아니야. 자기가 좋아하는 캠핑장 테마도 있고, 추리가 아니라 퀴즈 문제가 많은 곳도 있어. 햇볕이라도 피할 겸 가보자."


영보를 졸라서 간 곳은 생긴 지 오래된 방탈출 카페였다. 시설이 오래되고 탈출법도 일반적이어서 방탈출 고인물은 별로 찾지 않는 곳이었지만, 영보처럼 초보자가 재미를 느끼기엔 딱이라 오래된 곳임에도 성황리에 영업 중이었다. 직원에게 추천받아 학교 테마의 방에서 단서를 찾 자물쇠를 풀어 탈출하는 코스를 선택했다.


승아는 본인에 비해 늘 침착해 보이는 영보를 좋아했다. 대학교에 입학 후 모든 것이 낯설어 반쯤 둥둥 뜬 채로 두리번거리며 지내던 승아와 달리 고개를 약간 숙인 채로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던 영보에게 승아는 마음이 끌렸다. 둘은 조금씩 친해졌고 캠퍼스 곳곳을 데이트 장소 삼아 손을 잡고 돌아다녔다. 상경대학 매점에 달걀 샌드위치 들어왔대, 같이 가보자. 영보는 도서관 분수대 옆에서 샌드위치를 오물오물 먹고 있는 승아를 바라보면서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승아의 마음이 몽글몽글 피어 올랐다.


안 가겠다고 망설이던 모습과는 달리 숫자 배열 퀴즈를 쳐다보며 눈을 깜빡이고 있는 영보는 어느새 방탈출 카페에 푹 빠진 모양이었다. 승아는 이미 알고 있는 탈출 퀴즈였지만 모르는 척 영보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함께 학교 다니던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아, 알아냈다. 여자애 사물함 비번은 L.O.V.E 고, 자애 사물함 비번은 A.F.F.A.I.R 야. 역시 학교에서 사랑이 피어나는 법이라 건가."

"저 자애 이름 승아이고, 저 자애 이름은 영보이려나?"

"후훗. 자기 혹시 나 문제 푸는 동안 추억여행 중이었어? 그때 자기 툭하면 넘어졌었는데. 내가 항상 밴드 챙겨서 다녔었잖아."

"맞아. 맨날 꽈당 승아라고 부르면서 밴드 붙여 주길래 어디서 저렇게 밴드가 뿅 나타나나 궁금했었어."

"문제 푸느라 머리 썼더니 허기진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어느새 함께 손잡고 추억여행을 떠나된 둘은  오랜만에 샌드위치를 먹기로 했다. 대화하면 할수록 잊고 지내던 좋은 추억들이 떠올랐다. 이런 일도 있었지, 맞아, 저런 일도 있었지. 하하호호. 옛일을 떠올리며 걷다 보니 한낮의 뜨거운 열기도 로 뜨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미스토리님 아니세요?"

샌드위치를 가져다주던 점원이 말 걸었다.

"네?"

승아가 고개를 돌려 바라본 곳에는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아, 미스터리우스님, 여기 카페에서 일하세요?"

"네, 사장 아니고 직원이요. 아는 형 가게라 도와주고 있어요. 남자친구분이랑 같이 오신 거예요?"

"네. 이런 곳에서 뵈니 반갑네요."

"맛있게 드세요. 저희 가게 샌드위치가 요 근처에선 꽤 유명해요. 좋은 시간 보내다 가세요."

미스터리우스는 눈을 찡긋 하며 자리를 떠났다. 아마도 남자친구가 있다는 미스토리님의 그 말이 역시 거짓은 아니었네요, 그런 뜻이었겠지.


"미스리우스? 그 추리 유튜버? 추리 본다더니 그냥 잘생긴 남자 보는 거였네."

"무슨 뜻이야. 미스리우스 유튜브는 그림으로 영상이 올라온다고."

"어쨌든. 오프라인 모임도 꼬박꼬박 가잖아. 그때도 그림만 보는 건 아닐 거 아니야."

"오늘따라 자기 좀 삐딱하다."

"내가 못 가진 미모를 저 사람이 가지고 있어서 그런가 보지. 인간은 내가 못 가진 걸 가진 사람을 질투하는 법이. 인간의 본능이라고."

"자기도 가지고 있어, 미모. 자기야 말로 작은 눈에 각진 턱에, 얼마나 멋있어? 딱 내 스타일이라고."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에헴, 나는 지상 최고 미녀 미스토리님께 인정받은 공식 미남이로다. 감사드리옵니다. 미스토리님이여."

"자기야말로 내 닉네임 놀리는 거지? 자기가 미스토리라고 부르니까 뭔가 부끄럽잖아."

"아까 저 사람이 부를 때는 함박웃음이던데? 네, 미스리우스님, 저 미스토리예요."

"아, 진짜 이제 장난 그만해."

"알겠어, 알겠어. 이거 먹어봐. 분수대 옆에서 먹던 그 맛 난다."


늘 무던한 웃음만 짓던 영보가 간만에 장난을 걸어 왔다. 승아는 옛날 이야기를 하다보니 정말로 영보가 풋풋한 대학생으로 돌아간 건 아닐까 생각했다. 승아 자신도 대학생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세상을 그저 투명하게 마주 볼 수 있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왠지 세상을 보아도 자신이 만들어 낸 어떤 필터를 통해서만 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잘생긴 사람은 모든 여자들이 좋아하겠지. 이것은 영보가 만들어 낸 잘생긴 사람을 보는 필터일까? 어릴 땐 그냥 투명하게 '잘생겼네.'하고 감탄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나만의 필터가 하나 둘 늘어가는 일일지도 모른다.


- 8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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