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주변을 미리 둘러보고 정돈할 것.]
승아는 늘 도도하기만 하던 야군이 오늘따라 야옹거리며 승아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이 신기했다. 그래서 슬쩍 손을 뻗어 보았더니 웬일로 순순히 앞발을 내어주는게 아닌가. 야군 점은 늘 아리송 했는데 오늘은 뭔가 알 것 같았다. 그래, 이제 아침저녁으로 슬슬 찬 바람이 불더라. 선풍기는 정리하고 가습기를 꺼내 놓아야겠다. 승아는 건조한 바람에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계절이 바뀌어감을 느꼈다.
[오늘 회사 칼퇴 가능?]
[응. 요즘 특별한 일 없어서 6시면 퇴근 가능할 듯.]
[그럼 저녁에 한강에서 한강라면 어때?]
[좋아. 끝나자마자 저번에 그 편의점으로 갈게.]
[O.K.]
승아는 바쁘게 출근 준비를 하면서도 영보와의 저녁 약속에 기분이 좋아졌다. 저녁에 라면파티라니, 점심땐 미리 쌀밥을 먹어두어야겠다. 하루치 먹방 계획까지 세우며 즐거운 마음으로 지하철에 올랐다. 휴대폰에 연결한 이어폰에선 크라임씬 리턴즈의 대사가 흘러나왔다. 얼마나 많이 돌려보았던지 이제는 소리만 들어도 장면이 저절로 눈앞에 그려졌다.
'아, 지금 범인이 스스로 스포 한 부분이네, 근데 다른 출연자들은 아직 눈치 못 챘지. 이거 진대리한테 말해줘야겠다.'
승아는 영상 한 편이 끝나기 전에 회사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얼음을 넣지 않고 따뜻한 물에 믹스 커피만 부어 머그잔을 쨍강 거리며 스푼을 저었다. 마침 부장님도 출장 중이시고. 오전의 사무실에 살포시 내려앉은 평화, 참 귀한 날이다.
"자기는 너구리에 전주비빔이지? 난 육개장에 의성마늘 소시지. 맥주도 한 잔 할까?"
"좋지."
쏜살같이 흘러간 하루의 끝에 승아와 영보는 아직 밝은 한강의 공원에서 만났다. 시원해진 공기 덕분인지 라이딩을 즐기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승아와 영보는 자전거 전용길을 지나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계단에 자리를 잡았다.
"소시지를 육개장에 이렇게 찍어 먹으면 완전 맛도리라니까."
"승아야. 우리 맥주도 짠 하자."
"그래, 짠~"
"승아야. 우리 헤어지자."
"응?"
승아는 라면을 먹다 말고 이게 무슨 말인가, 바람결에 단어들이 바뀌어서 들리나,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몇 초 동안 가만히 있었다.
"승아야." "응."
"우리 헤어지자." "지금?" "응."
"일단 라면 좀 먹을까?" "응."
승아는 소시지를 육개장 국물에 찍어서 꾹꾹 씹어 삼켰지만 무슨 맛인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에는 왜? 왜? 왜? 물음표 만이 가득했다.
승아가 초점 없는 눈으로 라면을 다 먹을 동안 잠자코 기다리던 영보는 승아가 젓가락을 내려놓자 말을 꺼냈다.
"우리 오래 만났잖아. 나도 너에 대해서는 다 알고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니가 회사 남직원과 단둘이 꽃미남 유튜버를 쫓아다니는 취미생활을 즐기는 건 정말 이해를 못 하겠어. 나랑 데이트할 땐 삶이 힘들거나 지친다는 이야기뿐인데, 어쩌다 추리 모임 다녀온 이야기를 할 때면 얼굴이 활짝 피더라고. 그게 너무 힘들었어."
"그야 온전히 내 편인 사람이 자기뿐이니까 내 힘든 이야기를 한 거지. 미스터리우스 오프라인 모임 가는 건 자기도 기분전환 겸 잘 다녀오라고 해준 거잖아. 진대리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고. 진대리가 여자였어도 당연히 같이 갔을 거야."
"알아, 그렇지, 나도 아는데. 그걸 옆에서 계속 지켜보는 게, 그냥 내가 좀 힘드네."
승아는 말문이 막혔다. 진대리랑 바람이 난 거냐고 쏘아붙이면 변명이라도 할 텐데. 네가 네 취미생활 하는 게 그냥 싫다니. 변명할 거리도 없었다.
"아, 그럼 앞으로 내가 미스터리우스 오프라인 모임 안 가면 되지 않아? 그럼 진대리랑도 별로 따로 만날 일도 없어."
"아니, 앞으로 모임을 가는지 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야.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그 세계에서 네가 활짝 웃으며 행복해하던 그 모습이 계속 생각이 나서 힘든 거야. 네가 모임을 나가지 않더라도 그건 그냥 나 때문인 거잖아. 네가 아이처럼 행복해질 수 있는 곳이 거기인 건 변함이 없어. 우리가 우리여서 행복하던 시절은 그저 둘만의 추억거리로 전락해 버렸고 말이야."
승아의 입에선 더 이상 어떠한 단어도 나오지 않았고, 대신 숨죽인 눈물 만이 끝없이 쏟아 내렸다.
"불쾌한 순간에 버럭 불쾌한 티를 내는 게 쉬운 사람도 있지만, 그 순간 너 때문에 불쾌함을 느꼈다고 인정하는 게 너무 어려운 사람도 있어. 오랜 시간 동안 그 일을 혼자서 머릿속에서만 주물럭 거리다, 그래 없던 일로 해도 되겠어, 하기도 하고. 이번처럼 아무리 되새겨봐도, 그래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 하기도 해. 왜 그때 당장 말하지 않았냐고 따지고 싶겠지만, 미안. 난 원래 이런 사람인 걸 어떻게 해."
영보의 무던한 미소 뒤편엔 사실은 누구보다 예민한 감각들이 있었던 것이고, 온갖 것들이 영보 안의 거름망에서 몇 번이고 걸러지고 걸러진 후에야 상대를 무던하게 대할 수 있었다는 것을 승아는 미처 몰랐다. 취미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면 바뀌던 승아의 웃음, 말투, 분위기. 영보는 어느 하나 놓치지 않고 있었다.
평소 승아를 바라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던 그 시간 동안에도 영보는 얼마나 많은 말과 감정을 거르고 있었던 것일까. 승아가 승아 본인으로 살더라도 사랑받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동안 영보는 승아를 위해 얼마나 많은 걸 바꾸었을까. 아니면 이렇게 힌트 하나 없이 있다가 갑자기 홱 돌아서는 게 영보 그 자신인 것뿐일까.
승아는 그간 둘의 사이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편안하다고 느꼈었는데 영보가 불편한 부분을 덜어내고 다듬어 만들어진 결과라 생각하니, 천생연분이란 하늘의 뜻이 아니라 관계를 지키고자 하는 자의 끝없는 노력 덕분이란 걸 깨달았다. 더 이상 관계를 이을 의지를 버리고 남보다도 더 무심한 눈빛만을 보내는 영보를 보고서야 말이다.
- 9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