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아가 야군의 특별한 능력을 알게 된 것은 이 회사에 입사하고 6개월쯤 지난 때였다. 처음에는 승아 본인의 능력이라고 생각했지만, 영보, 멍군, 다육이 등 주위의 다른 다양한 생명체로 실험해 본 결과 오직 야군에게서만 느껴졌기에 승아는 이것을 야군의 특별한 능력이라고 믿게 되었다. 여느 날처럼 아침에 일어나 야군을 안고 밤새 별일 없는지 확인하던 그때였다.
[오늘은 그간의 노력이 빛을 발하게 되므로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 걱정하지 말 것]
갑자기 이게 뭔 소리야. 들린다고 하기엔 방안이 너무 조용했기 때문에 느껴진다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승아는 야군의 앞발을 붙들고 있는 동안 점쟁이의 운세풀이 같은 문장이 정확하게 느껴졌다. 어떤 날은 추상적이고 어떤 날은 구체적이었지만 그 내용이 명확하게 승아에게 인식되었다. 혹시 심심풀이로 본 이달의 별자리 운세에서 읽은 내용들을 혼자 생각하는 건가 싶었지만 승아가 들어보지도 못한 단어가 느껴져서 국어사전에 뜻을 찾아볼 때도 있었다. 하루이틀 지날수록 야군이 주는 느낌이 현실과 딱 들어맞다 보니 처음엔 호기심에 잡아보던 앞발을 이제는 진짜 점보는 심정으로 아침마다 진지하게 잡고 있다.
처음으로 야군 점이 느껴진 날에는 회사에서 갑작스레 사원 한 명이 그만두는 바람에 중요한 업무의 일부가 승아에게 배정되었다. 괜한 일이 늘었네. 다소 곤혹스러운 마음으로 전임자의 자료를 살펴보다가 승아는 작지만 중대한 오류를 발견하게 되었고, 선배에게 그 사실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선배의 조언에 따라 부장에게 직접 첫 보고를 하게 되었다. 일이 커질까 걱정도 됐지만 전임자의 실수가 손해로 이어지지 않은 시점에서 미리 발견한 것이었기에 누구의 잘잘못을 따질 필요 없이 후임자인 승아가 실수를 바로잡는 몇 가지 일들만 추가로 하면 충분하였다. 그때부터 승아는 부원들이 조금 더 본인을 지켜보는 느낌을 받았고, 프로젝트의 중요한 일 몇 가지에 대해서도 내용을 공유하고 함께 논의하는 사람이 되어갔다.
'역시 야군 점은 한마디도 쉬이 넘길 수 없다니까. 좀 명확하게 짚어서 알려주면 더 좋겠지만, 그건 너무 큰 욕심이겠지. 오늘은 우리 야군 줄 츄르라도 사가야겠다.'
새삼 야군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며 책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승아의 개인 휴대폰으로 진대리가 보낸 문자메시지가 왔다.
[승아 씨. 괜찮으시면 □□역 앞 스타벅스로 가실 래요?]
[네, 좋아요. 6시 5분에 1층에서 만나 같이 이동하시죠.]
문자메시지 확인 즉시 답장을 남긴 승아는 시간을 체크하고 가방을 챙겼다. 잠시 뒤 1층에서 만난 승아와 진대리는 승아의 집과 진대리의 집의 중간쯤에 있는 □□역으로 함께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다.
"제가 갑자기 커피 같이 마시자고 말씀드려서 혹시 놀라셨나요?"
따뜻한 디카페인 라떼를 승아에게 건네며 진대리가 물었다.
"조금은요. 후훗. 저 남자친구 있는 건 아시지요?"
"물론이죠. 사실은 어제 승아 씨네 부서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승아 씨 책상을 봤거든요. 근데 승아 씨 모니터에 빨간 나비넥타이 스티커가 붙어 있더라고요. 그거 보고 용기 내서 여쭤본 거예요. 그거 목소리 변조 넥타이 맞죠?"
"우와, 진대리님.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혹시 추리덕후?"
"덕후까지는 못되지만 그래도 추리물은 웬만하면 거의 다 좋아해요. 최근에 셜록 시즌 5 나온다는 소문 듣고 시즌 1부터 정주행 중이에요."
"저는 셜록은 시즌 초반이 제일 재밌더라고요. 시즌 4에서는 좀 캐붕이었던 것 같고. 히가시노 게이고도 좋아하세요?"
"책을 다 읽은 건 아닌데 영화는 일본 것도 한국 것도 좋아해요."
"저희 집에 책 다 있거든요. 보고 싶은 책 알려 주시면 빌려드릴게요."
승아는 진대리의 입에서 코난의 넥타이 이야기가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 처음으로 둘이서만 커피를 마시는 자리라 어색하면 어쩌나 했는데 한번 대화의 물꼬가 트이자 둘은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한 자리에서 두 시간이나 떠들었다.
"저는 추리물은 좋아하지만 추리는 잘 못해요. 남자친구가 한 거짓말을 하나도 못 알아채겠더라고요."
"남자친구가 무슨 거짓말을 하는데요?"
"고양이를 좋아한다고 해놓고 사실은 개를 좋아한다거나, 술을 잘 못 마신다고 해놓고 사실은 소믈리에 자격증이 있다거나 하는 것들이요."
"그건 딱히 거짓말이 아니라서 그런 거 아니에요? 고양이랑 개 둘 다 좋아하고, 와인을 좋아하지만 알콜이 잘 안 받는 체질일 수도 있고요. 그럼 거짓말은 아닌 거 같은데."
"그런가요? 저는 뭔가 속은 느낌 같았거든요. 대리님이 저 보다 더 논리적이신 분 같네요. 진록 대리님."
진대리는 애초부터 승아와 남자친구 사이에 끼어들 마음이 없었지만, 연인 사이 거짓말에 대한 불만이 고작 이런 것뿐인 관계라면 둘 사이에 끼어들 틈은 1mm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아는 개인사에 대한 이야기를 비밀로 하는 것엔 크게 재주가 없었다. 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걸 싫어하다 보니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본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 이야기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선이 있었다. 그 선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만 질문을 받고 대답하였으며 선을 넘는 경우 자연스럽지만 단호하게 피할 줄 알았기에 회사에서 개인사를 공유해도 사생활을 침해당한다는 느낌은 받지 않았다.
"승아 씨, 오늘 고마웠어요. 앞으로 종종 이런 이야기 같이해도 될까요. 제 주위에는 추리물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서요."
"물론이에요, 대리님. 저도 마찬가지예요. 크라임씬 새 시즌 오픈하면 후기 공유하시죠. 잘 들어가세요."
승아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새로 알게 되어 반가웠다. 그 사람이 회사에서 젠틀하기로 유명한 진대리라서 더 좋았다. 좋은 취미 메이트를 만나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 승아는 모르는 사람과의 모임에 혼자 참여해 볼 만큼 취미 메이트가 간절한 건 아니라서 늘 그랬듯이 홀로 책을 읽고, 영상을 보며 살아왔다. 그런데 오늘 진대리와 추리에 대해 이것저것 떠들다 보니 역시 마음 맞는 취미 메이트가 있다는 것은 취미생활이 두 배, 세 배로 풍요로워지는 길 같았다.
'아무래도 재계약 해야겠다.'
인생의 기로에서 하는 중요한 선택을 아주 사소한 이유로 결정하게 되는 게 인간의 귀여운 점이 아닐까. 스멀스멀 올라오는 일상의 지겨움에 이직을 고려했지만 앞으로 당분간은 새로운 취미 메이트와의 재밌는 추리 생활이 이어질 것 같으니까, 무엇보다 이거다 하는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승아는 부장이 뭐라든 이번 재계약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5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