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아가 다니는 회사 화장실의 한쪽 벽면에는 칫솔과 치약이 가득 찬 수납장이 걸려있다. 승아는 두 번째 칸 맨 구석에 있는 자신의 치약을 꺼내어 칫솔 가득 쭉 짰다.
'치약은 역시 솔향 나는 게 최고지. 민트향 치약은 너무 강하다니까. 그치만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은 또 맛있는걸.'
요즘엔 솔향 나는 치약을 구하기가 어렵다. 기존에 쓰던 브랜드가 판매를 중단한 뒤 새로운 브랜드의 솔향 치약을 써 보았는데 그것은 솔향 보다는 소금향이 더 강한 편이었다. 기존에 쓰던 치약을 찾기 위해 중고물품 거래앱을 한참 뒤진 결과 10개짜리 묶음 3개를 겨우 구할 수 있었다. 아껴서 썼지만 이제 겨우 5개밖에 안 남았다. 남은 치약을 다 쓰면 어떡하지. 다른 향 치약에 도전해 봐야 되나. 물론 승아는 다른 치약을 쓰지 못 할 만큼 까탈스럽지는 않다. 다만 하루 세 번 이 닦는 시간의 즐거움을 위해 조금 더 신경 써서 치약을 고를 뿐이었다. 더 이상 기존의 솔향 치약을 구할 수 없다면 아마도 당분간 마음에 드는 치약을 찾아 모험을 떠나는 재미에 빠지게 될 것이다.
"부장님실에 누구 들어갔나요?"
"어, 승아 씨. 아까 점심시간 끝무렵에 부장님 손님이 오셨는데 아직 계시는 것 같아요."
이건 계획에 없던 건데. 점심시간 직후가 부장의 기분이 가장 말랑할 때이므로 그때 보고서를 들고 들어가는 게 빨리 통과될 확률이 높았다. 아니면 아주 적은 양의 수정 요구만 받거나. 그런데 이런 해피타임에 손님이라니. 말이 손님이지 불청객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귀찮은 손님의 귀찮은 요구를 겨우 거절한 뒤라면 부장의 기분도 한껏 가라앉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손님이 떠난 후 한 타임 쉬고 들어가는 게 낫다. 부장에게도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예전에 멋도 모르고 어려운 결재를 여러 건 연속으로 처리한 부장에게 보고서를 들고 들어갔다가 잔소리와 함께 엄청난 일거리를 받아 오곤 했다. 누군가는 회사일을 기분에 따라 하면 어쩌냐고 불평할지도 모르겠으나, 승아는 그 태도가 이해되었다. 승아 역시도 남자친구와 싸운 다음날엔 동료직원들에게 친절하게 협조하기가 어려웠고, 부장의 아이스 브레이크용 농담도 웃으며 받아주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본인 스스로도 그럴진대 부장이라고 어떻게 기분과 상관없이 일관되게 일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사람이라면 이 회사에서 부장을 하고 있을 리 없다. 절에서 부처가 되기 위해 도를 닦고 있으면 모를까.
승아는 모니터를 쳐다보며 가벼운 업무 몇 가지를 처리하면서 부장실 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시끌벅적 인사하는 소리가 나는 걸 보니 드디어 손님이 돌아가는 모양이다. 시계를 보니 1시 40분. 오래도 있었네. 2시 10분 이후에나 들어가면 되겠다고 생각한 찰나, 올해 초 공채로 들어온 신입 직원이 부장실로 쏙 들어갔다. 어휴. 십분 남짓 후 한결 시무룩한 인상과 축 처진 어깨의 직원이 부장실에서 나왔다. 안 되겠어, 2시 30분은 지나야 안전할 것 같다.
승아는 그새 남아있는 간단한 업무를 모두 처리했기에 일단은 취업 사이트를 둘러보기로 했다. 승아의 희망 근무지역, 희망 연봉, 희망 업무 등 몇 가지 정보를 넣자 주르륵 목록이 떴다. 한눈에 보기엔 꽤 되어 보였는데, 하나하나 읽어보니 입력한 정보에 맞지 않거나 직접 문의하라는 내용이 대다수였다. 지금의 회사보다 좋아 보이는 조건은 하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전체선택을 조건으로 하여 전반적으로 둘러보다 보니 뜬금없이 유명 커피전문점에서 바리스타를 모집하는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근무시간도 몇 가지로 선택할 수 있고, 복지 제도도 쏠쏠했다. 승아가 요즘 읽고 있는 책이 커피에 대한 내용이어서 그런지 바리스타 모집 안내에 자신도 모르게 눈길이 머물렀다.
'이제 더이상 20대 중반도 아닌데, 바리스타를 새 직업으로 선택할 수 있을까? 내가 개인 커피숍을 차리려는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1인 카페는 창살 없는 감옥 이랬어. 미연이도 2년간 감옥에 갇혔다가 결국 다시 취직했잖아. 재미로 바리스타를 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은 것 같아, 난.'
바리스타는 확실히 재밌을 것 같긴 했다. 하루종일 화장실 갈 틈도 없이 바쁘더라도 하루치의 노동이 퇴근과 동시에 종료되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 회사원에게는 며칠, 몇 주, 몇 달을 끌고 가야 하는 크고 작은 마무리되지 않은 일들이 존재했다. 승아의 컴퓨터에도 여러 개의 폴더가 있고 그 폴더마다 마무리되지 않은 ver.몇의 파일들이 있었다. 오늘의 노동은 퇴근과 동시에 종료되지 않았고, 때로는 꿈에서도 보고서를 수정하고, 때로는 진짜 날밤을 새며 보고서를 수정해야 했다. 20대 끝물에 뭐 하는 짓이냐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튕겨낼 수만 있다면 바리스타에 도전하는 것을 선택지에서 제외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해보고 별로면 그만두면 되지 않는가. 슬슬 승아 스스로가 자신을 설득해나가고 있을 무렵 부장실에서 소리가 들렸다.
"승아 씨 좀 들어오라고 하세요."
승아가 들어가기도 전에 부장이 먼저 찾다니. 승아는 얼른 출력해 놓은 자료를 꺼내 들고 부장실에 들어갔다. 부장은 다른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그전에 이 보고서를 내밀어야 했다.
"부장님, 찾으셨습니까."
"아, 승아 씨, 거기 앉아요."
회의용 테이블에 부장과 대각선으로 앉은 승아는 보고서가 든 결재판을 부장 앞에 슬쩍 놓았다. 부장이 이게 뭔가 싶은 눈을 했지만, 이내 포스트잇 붙인 부분을 펼쳐 보더니 '좋아요, 이렇게 제출하세요.' 했다.
'뭐야. 생각한 것에 비해 너무 빨리 통과됐잖아. 지난 검토 때는 삼십 분을 넘게 잡혀있었는데. 진짜 알 수가 없다니까. 그렇지만 뭐 이런 결과라면 싫어할 이유가 없지.'
"승아 씨. 승아 씨도 우리 회사에서 근무한 지 1년 9개월이 지났네요. 그래, 다녀보니 우리 회사 어때요?"
어떻냐니, 너무 직접적인 물음이다. 부장이 어제 인사팀장과 만났던가? 재계약 관련된 이야기를 인사팀에서 들은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승아가 일한 날짜를 부장이 직접 셌을 리가 없다. 승아 자신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음. 좋은 점은 좋고 나쁜 점도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전반적으로는 좋은 게 더 많았습니다."
"하하, 나는 승아 씨의 이런 점이 좋아요. 결재할 때도 승아 씨 보고서를 검토하는 것이 참 재밌어요. 말도 잘 통하고 나 어릴 때 일하던 게 생각난다고나 할까요."
"아, 네."
"승아 씨는 우리 회사랑 재계약을 할 건가요?"
"아, 그건 제가 좀 생각해 보겠다고 인사팀에 말씀드렸는데요."
"최종 결정 말고, 전반적인 승아 씨의 생각이요. 난 승아 씨와 일하는 게 좋아요.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승아 씨가 재계약을 했음 하는 마음이 있어요."
"좋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승아 씨 입장에서 생각하면 다른 회사에 정규직으로 일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어제 인사팀에 물어보니 승아 씨는 재계약을 하더라도 정규직 전환은 힘들다고 해요. 승아 씨가 문제라서가 아니라 승아 씨가 있는 그 자리가 정규직으로 전환하기 힘든 자리래요. 내 생각이지만 승아 씨는 프로젝트가 끝나면 없어질 계약직 자리에서 시간을 보내기엔 아까워요. 정규직 자리가 있는 곳을 찾아 회사를 옮기는 것은 어때요. 물론 나는 서운하겠지만요."
부장이 승아를 신경 써서 해주는 말을 듣자 승아는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냥 밑에 두고 부리기 좋은 직원으로 생각하는 줄 알았더니, 인사팀에 정규직 전환도 제안해 주고 커리어 패스까지 걱정해 주다니. 예상 밖이라 감동이었다. 오늘 아침 야군 점이 말하는 게 이거였나.
[끝까지 쉽게 결론 내리지 말고 고심하고 또 고심할 것]
보고서가 쉽게 끝나지 않을 거라는 뜻인 줄 알고 오전부터 신경 썼는데, 그게 아니라 부장에 대한 판단을 쉽게 하지 말란 말이었나 보다. 승아는 부장이 왜 다른 부장들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나이에 그 자리에 올랐는지 조금은 알게 된 기분이었다. 부원에 대해 일일이 관심을 갖는 것은 실적지향 조직 문화에서 흔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승아는 계약직 직원이었음에도 정규직 직원과 같이 애정 어린 눈으로 보아준 것이다.
- 4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