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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옷 Feb 16. 2024

승아의 점심

2화

'이 정도면 된 것 같은데. 일단 내가 봤을 때는 마음에 들어.'


승아는 하던 일을 마무리하면서 책상 위에 놓인 시계를 보았다. 사무실 벽에 걸린 시계 있지만 수시로 시간을 흘끔거리다 맞은편 직원과 눈이 두세 번 마주친 이후로는 컴퓨터 바로 옆에 탁상시계를 두었다. 완전 무소음 기능이 있는 것으로. 시계는 11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엔 애매한 시간이기에 승아는 일단 완성한 ver.4 자료를 출력하고 부장이 수정요구한 부분에 포스트잇을 붙여 놓았다. 자료를 책상 서랍 안에 넣어둔 뒤 화장실을 가는 척하며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승아는 점심시간이면 회사에서 나와 혼자식당 다. 다른 직원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편은 아니나 12시부터 1시까지의 소중한 한 시간은 오롯이 혼자만을 위한 시간으로 만들고 싶었다. 이 회사에 입사하기 전, 기존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그 사이에 3개월 간의 공백기가 있었는데 승아는 그때 다이어트에 돌입하여 10kg가량 몸무게를 줄였다. 눈으로 보기에 그리 비만은 아니었으나 고혈압, 고지혈증 등의 병명을 하나둘씩 진단받던 시기였기에 마음먹고 식단을 조절하고 운동을 하였다. 승아가 기존에 다니던 회사는 야근이 잦았고, 자기 전 스트레스를 먼저 잠재우기 위해 맥주를 마시며 자를 아작아작 씹어먹는 날이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2kg, 몇 달 후 또 3kg, 이런 식으로 야금야금 몸무게가 늘어났고 마침내 정기 건강검진에서 고혈압과 고지혈증 약을 먹어야 한다는 진단을 받은 것이다.


회사원인 채로 다이어트를 하는 건 무리였다. 회사에서 이미 하루치의 의지력을 다 사용해 버린 터라 다이어트를 위한 의지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3개월간 백수기간에 마음껏 다이어트에 집중할 수 있었다. 승아는 두부와 양배추를 좋아하는 본인의 입맛에 감사했다. 물론 삼겹살과 소갈비도 좋아하지만 두부와 양배추 만으로도 나름의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간도 많이 남아 낮에는 두세 시간씩 마을을 산책했다. 우리 동네에 이런 멋진 거리가 있었군, 시장이 그저 놀고 있지만은 않네. 승아는 새삼 꼼꼼하고 다정한 시정에 감사하며 잘 정돈된 동네 곳곳을 돌아다녔다. 집에서는 티브이를 보며 훌라후프를 돌렸다. 그때마다 야군은 방에 숨어 거실로 나오지 않았고, 드라마 한 편이 끝나고 나면 승아의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별스러울 것 없는 다이어라도 효과는 상당했다. 승아는 줄어든 체중계의 숫자도 좋았지만, 줄어든 혈압계의 숫자가 더 좋았다. 이대로라면 다음 건강검진 때는 고혈압과 고지혈증 약을 졸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우울한 기분이 사라진 점이 제일 좋았는데, 회사에 다닐 땐 맥주와 자가 나를 위한 소소한 힐링인 줄 알았으나 사실은 자신을 가장 푸대접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회사 일로 스트레스를 받 승아에게 필요한 건 알코올과 튀긴 밀가루가 아니라, 땀 흘리는 걷기와 달리기였다. 동네를 걸었다는 이유로 이렇게나 마음이 맑아질 수 있다는 것에 감탄했다.


그 후로 승아는 새로운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도 점심시간만큼은 사수하여 회사 근처를 돌아다녔다. 식사는 골목에서 마주치는 작은 식당에서 간단히 해결했다. 김밥이나 된장찌개나 김치볶음밥 같은 것들로. 특별히 먹고 싶은 메뉴가 있는 날이면 부지런히 움직여 미리 찾아놓은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승아는 주위 눈치를 보느라 혼밥을 못하는 스타일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혼자서 밥을 먹을 때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직원들과 대화하며 먹다 보면 밥이 무슨 맛인지 느낄 새도 없이 말하다가 꿀꺽 삼키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원들과의 친목도모를 위 저녁 회식은 빠지지 않지만 점심시간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양보하는 법이 없었다. 동료 직원들도 입사 초기 한  번은 같이 점심을 먹자고 권하였지만, 승아가 혼밥 노선을 확실히 표현한 후에는 다들 그러려니 할 뿐 뭐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덕분에 승아는 오늘도 자신만의 점심시간을 즐기러 갈 수 있었다.


'오늘은 왠지 카레인 걸. 공원 반대편까지 부지런히 걸어가면 시간 내먹을 수 있을 거야. 오후에는 부장님한테 보고서 들고 들어가야 하니, 전투식량을 미리 먹어 놓아야지.'


승아는 공원 끝에 있는 카레집의 가지카레를 특히 좋아하였다. 공원을 가로질러 가는 사이 귀여운 강아지와 쉽게 보기 힘든 산책냥이를 발견하였지만, 귀여워할 새도 없이 빨리 걷기에 집중했다. 오늘 점심으로 카레를 먹는다면 부장을 위한 상냥한 말투와 희미한 미소 정도는 쉽게 장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잠시 후 식탁 위오랜만에 보는 진한 카레가 가득 놓였다. 승아는 망설임 없이 크게 한 숟가락 떴다. 흐물한 듯 쫀득한 가지의 식감과 맵게 톡 쏘는 카레의 향이 승아의 입을 즐겁게 했다. 카레집은 회사와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어 직원들을 마주칠 일은 없었다. 대학생인 듯한 커플 하나와 동네 주민 모임인 듯한 여자 3명이 다른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엿들을 생각은 없지만 식사를 하다 보 옆 테이블에서 하는 이야기가 저절로 승아의 귓가에 흘러 들어다.


"아직도 저번 교통사고 보험금을 못 받았어. 병원 진료도 끝났고, 차도 이미 팔았는데 말이야."

"그럴 때는 보험 처리하는 직원을 닦달할게 아니라 보험회사 본사로 클레임을 걸어야 해. 보험회사는 이미지 먹고살잖아. 나도 저번에 회사 본사로 민원 넣었더니, 바로 입금해 주더라고."


승아는 왠지 보험금을 못 받아 곤란한 아주머니보다는 클레임 때문에 본사에서 구박받는 보험회사 말단 직원에게 마음이 더 갔다. 보험회사에서 악의적으로 지급을 미루는 게 아니라 내부에 필요한 결재를 받는 과정이라면, 그 직원도 보험금 지급 검토 보고서가 ver.4가 되도록 반려되고 있는 상황이라면. 아니, 괜한 생각이다. 이럴 땐 새우튀김이다.


"사장님, 여기 새우튀김 두 조각 추가해 주세요."


살다 보면 세상이 자기를 속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실상은 다들 자기 한 몸 건사하기 바빠서 남을 속일 시간도 없을 때가 많다. 물론 그 사이 남을 속이는 것이 본인을 건사하는 방식인 사기꾼들도 간혹 섞여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일반인은 자기 삶을 살기 바쁘다. 그걸 알기에 승아도 무언가 세상에 과도한 억울함을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지금처럼 새우튀김이 세 개 나오는 경우라도. 주인아저씨가 바빠서 착각한 것이지, 고작 새우튀김 하나 더 팔아 보겠다고 일부러 하나 더 튀긴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다.

 

승아는 착실하게 가지카레와 새우튀김 세 개의 값을 지불하고 나서 다시 길을 나섰다. 서둘러 걷지 않아도 사무실엔 제시간에 도착할 듯했다. 회사로 돌아가는 길의 공원은 괜히 아련해 보인다. 저 신난 강아지들과 연못 안 오리들과 조금 더 같이 있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승아는 아련한 공원을 뒤로하고 사각의 사무실로 발걸음을 내딛는 일이미 익숙해졌다. 시간이 넉넉한 주말에는 공원 근처에 오지 않으므로, 공원을 아련히 여기는 마음은 오직 출근했을 때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건 공원 그 자체는 아니야. 그러니 내가 싫어하는 건 부장 그 자체는 아닌 거야.'


승아는 오늘도 나름 만족스러운 점심시간을 보낸 것 같았다. 그나저나 저녁엔 어느 카페로 가지. 진대리가 생각해 놓은 곳이 있으려나, 아니면 내가 찾아봐야 되나. 이런 생각을 하며 남자친구 영보와 문자메시지로 연락했다.


[오늘 점심 완료. 가지카레에 새우튀김. 저녁엔 사무실 사람이랑 약속이 있어.]

[메뉴를 보니 오늘 꼭 해결해야 되는 일이 있나 보네. 나는 저녁에 멍군이 산책시키러 한강 다녀오려고.]

[꽤 멀리 가네. 멍군이한테 누나 안부 전해주고.]

[오케이. 오늘 유산소는 이걸로 끝이다.]


사무실 사람과의 약속이라고 해도 세세하게 캐묻지 않는 텐션이 승아가 영보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다정한 것과 말이 많은 건 다르다. 영보는 항상 간단한 말로 다정함을 표현한다. 사랑해, 보고 싶어 따위는 승아가 연인에게 듣고 싶은 말이 아니다. 사무실 사람과 약속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믿고 더 이상 묻지 않는 것이 승아가 원하는 다정함이다. 또한 승아에게 사랑해, 보고 싶어 따위의 말을 할 것을 강요하지 않는 것승아가 원하는 사랑이다. 그런 의미에서 승아와 영보는 천생연분이라고, 승아는 늘 생각해 왔다. 애쓰지 않고 승아 본인으로 살더라도 괜찮다고 하는 사람. 아니 오히려 더 좋다고 하는 사람. 승아는 휴대폰 문자메시지 창을 닫고 엘리베이터의 8층 버튼을 눌렀다.

 


-  3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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