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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옷 Feb 15. 2024

승아의 오전

1화

승아는 눈을 뜨자마자 같이 살고 있는 야군을 잡아 똬리 튼 무릎에 앉힌 후 앞 발을 잡고 가만히 눈을 쳐다다.

 

"으흠. 오늘도 느껴진다 느껴져."


버둥거리는 야군을 풀어준 후 부엌으로 가 그릇 가득 물을 받고 사료를 담아 야군 앞에 두었다.


날씨가 추워진 탓에 보일러를 더 자주 돌려서 그런 지 방 안의 공기가 아주 건조했다. 목 찢어지는 줄 알았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가습기를 사야겠다고 결심했다. 수건 몇 장 널어서는 감당이 안 되는 건조함이었다. 많지 않은 월급에 이렇게 보일러를 돌리는 건 사치인가 싶었지만, 그래도 역시 추운 건 싫었다. 겨울을 위해 넓은 집으로 이사 가지 않고 좁은 살림살이를 유지하고 있는 것인데. 바닥이 뭉근히 덥혀질수록 승아의 마음도 따뜻해지는 듯했다.


원래는 아침을 잘 챙겨 먹지 않는 승아이지만 오늘은 특별히 베이글을 데웠다. 새로 산 오븐 토스터를 사용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고, 따뜻한 커피를 빈 속에 부어 넣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역시. 커피 향은 좋다. 야군의 아드득 거리는 사료 먹는 소리를 ASMR 삼아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발랐다. 평소보다 십 분 빨리 일어났으니, 오늘의 아침식사 시간은 십 분이다. 빵을 데우고 커피를 내리는데 분 썼으니 엄밀한 식사시간은 십일 분인가. 하지만 이 조차도 여유롭게 느껴질 정도로 기분이 좋은 아침이다.


인간이 ASMR에 빠져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아무 의미가 없는 소리여서 그런 건 아닐까. 우리는 늘 '의미'의 덫에 빠진다. 장님이 불러서 한 그 말은 무슨 의미일까, 남자친구가 보낸 카톡 메시지는 무슨 의미일까, 지나가는 저 남자의 눈빛은 무슨 의미일까. 하다못해 내 인생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요. 기도를 할 때마다 묻게 된다. 이렇게나 의미를 궁금해하는 우리들은 오히려 아무 유추해 낼 의미가 없는 반복적인 소리 모음, ASMR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단지 사물과 사물이 부딪혀서 발생하는 소리 파동.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름다움도 추함도 중요함도 불필요함도 아무 의미 없는 그냥 소리 그 자체. 아, 야군의 아드득 소리엔 귀여움이라는 의미가 있긴 하구나.


이런 생각을 할 때쯤, 지하철은 목적한 역에 도착했다. 승아는 지하철에 올라탈 때부터 지킨 문 앞자리에서 가뿐하게 하차다. 이대로 사거리 하나만 건너면 회사 도착이다. 그 순간 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승아 씨."


옆 부서의 진대리다. 혹시라도 못 들을까 봐서 승아의 어깨를 톡톡 쳤다. 하지만 직장인은 대부분은 전광석화와 같은 이름 반사 능력을 가졌다. 어디선가 본인의 이름이 들리면 일단 스프링처럼 '네'하며 일어나게 되는 능력이다. 특히 회사 근처로 올 수록 능력치는 높아진다.

 

"아, 대리님. 지하철 타고 출근하시는 거예요?"

"오늘 자동차 배터리가 방전됐더라고요. 시동이 안 걸려서 지각할 까봐 그냥 지하철 탔어요."

"날이 추워서 그랬나 봐요. 그래도 진대리님이니까 갑자기 지하철 타셔도 지각 안 하시네요."


진대리는 평소 회사에 삼십 분 정도 일찍 출근했다. 승아가 주관하는 회의가 오전 일찍이 잡혀 회의준비로 빨리 출근한 적이 있는데, 그때에도 진대리는 이미 출근한 상태였고 바쁜 승아를 도와 주다. 승아는 진심으로 고마웠지만 바쁜 일도 없으면서 항상 빨리 출근하는 진대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본인의 시간이 별로 중요하지 않는 타입인가.

 

그날따라 사거리 신호등은 한참을 바뀌지 않는 느낌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어 버렸으면. 그 순간 초록불로 바뀌었고 먼저 한 발을 내디딘 행인이 그 앞을 빨리 지나가는 오토바이에 놀라 '억'하고 큰 소리를 내었다. 오, 나쁘지 않았어. 재빠르게 피했지만 그래도 어디 부딪히진 않았나 싶어 승아는 행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놀란 것 같긴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는 건널목을 뛰어서 건너갔다.


"저 사람,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요."

"출근시간엔 차도 사람도 모두 빨리 가는 데만 정신이 쏠려서요. 조심하지 않으면 큰일 나죠."

"맞아요. 앞만 보고 다니니까요. 건널목에선 좌우를 보고 건너라고 유치원에서도 가르치는데. 아무도 안 듣는다니까요, 선생님 말 같은 건."


둘은 엘리베이터를 타고는 익숙한 듯 8층을 눌렀다. 리베이터가 8층에 도착하면 좋은 하루 보내라고 인사하고 각자의 자리로 가면 될 일만 남았다.


"승아 씨, 혹시 오늘 저녁때 시간 되세요?"

"네, 대리님도 좋은 하루.. 네?"

"시간 되시 저랑 커피 한 잔 드실래요?"

"아, 네네. 그러시죠."


갑작스러운 제안이었지만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거절의 멘트가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승아는 진대리와 별로 친한 사이는 아니다. 승아 자체가 마음속에 '회사 사람'이라는 바리케이드를 치고 살기 때문이기도 하고, 옆 부서에서 별 접점이 없는 일을 하기에 친해질 기회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커피  잔을 따로 마실 사이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시지 못할 사이도 아니었다. 피 한 잔 하자는 말에 혼자 의미를 부여하며 거절하는 것도 왠지 자의식 과잉 같아 싫었다.


승아는 자기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어제 마치지 못한 작업의 파일이 ver.3의 이름을 달고 바탕화면에 깔려있었다. 오늘은 기필코 최종컨펌을 통과하고 말리라. 파일 아이콘을 노려보며 일단은 먼저 메신저를 켰다. 이런저런 잡담과 인사 메시지가 몇 개 쌓여 있다. 그 사이 '메일 확인바람'이라고 쓰인 긴급 메시지보였다. 대충 무슨 내용인지만 적어주어도 좋으련만. 메일함에 들어가서 메일을 열 때까지 무슨 용건일지 걱정하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기대가 될만한 메일은 아닐 것임이 분명했다.


[계약 종료 예정일 알림 및 재계약 안내]


아. 벌써 재계약 시즌인가. 아는 순간적으로 머리가 지끈해짐을 느꼈다. 못 본 척 메일함을 닫을까 싶었지만 이미 메신저가 읽음 처리되었을 거라 미루지 않고 메일을 읽어야 했다. 젠장맞을 기술의 발전. 메신저는 왜 내가 메시지를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조차 관심을 갖는다는 말인가. 기계 주제에. 하지만 회사에서 업무를 회피하려고 메시지를 읽어놓고도 '어머, 제가 아직 메시지 확인을 못했어요. 죄송해요, 승아 쌤.'하는 인간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을 당연히 안다. 젠장 맞지만 좋은 기술의 발전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미루지 않고 클릭.


[귀하의 계약 종료 예정일이 90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우리 회사는 귀하와의 재계약을 희망하므로 재계약 조건을 확인하고자 하는 경우 인사팀에 직접 방문하여 주시기 바라며, 재계약을 희망하지 않는 경우 30일 전까지 인사팀에 통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메일의 내용은 간단하다. 우리는 너랑 재계약하고 싶은데 어떤 조건인지는 미리 안 해줄 거고 우리랑 잘 협상해 보자. 일단 계약종료 통보는 아니라서 다행이긴 하다. 그러나 승아는 협상 같은 것 성미에 안 맞는 인간이었다. 회사가 어떠한 조건을 제시해도 '네네, 아, 네.' 할게 뻔했다. 제발 '네'는 한 번만 하라고, 두 번씩 하지 말고.'아'도 빼고. 승아는 말 한마디를 뱉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한 번씩 피드백을 했지만, 저자세인 태도는 잘 고쳐지지 않았다.

  

언제 인사팀을 방문할까. 오늘은 좀 그렇지. 승아도 자신이 생각하는 계약 조건을 다시 한번 정리해 놓을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정규직인 회사에 취직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안정적인 생활을 꾸리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연봉에 크게 욕심만 안 부린다면 승아의 스펙으로 적당한 회사 정도는 취업할 수 있었다. 대학생활도 성실하였고, 실무 경력도 꽤 되었다. 실제로 아는 사람을 통해 스카우트 제안을 받은 적도 있다. 하지만 승아는 왠지 본인이 정규직에는 안 맞는 사람 같이 느껴졌다. 조직에 대한 소속감도 별로 없고, 무엇보다 한 곳에서 정년까지 쭉 일해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웠다. 때가 되면 승진도 하고 근무 환경도 조금씩은 바뀌겠지만, 전체적으로 익숙한 환경에서 몇십 년을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막연히 두려웠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지금 회사도 2년 가까이 다녔더니 조금씩 지루함을 느끼고 있는 와중이었다. 그냥 계약연장을 하지 말까. 지금 같은 경기에 그만둔다고 하면 배부른 소리라고들 하겠지. 남들이 뭐라던 별 개의치 않는 성격의 승아이지만, 그래도 지루한 것 빼고는 계약조건이 좋은 편이라 아무래도 연장을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럼 구직사이트에서 요즘 분위기를 좀 관찰해 봐야겠다. 좀 할만한 일이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만약 재계약을 한다면 2년 말고 1년이 좋을 것 같아. 혹시 부서를 바꿔달라고 할 수 있을까? 저번에 진대리네 부서도 일 손이 모자라다고 했잖아. 새로운 업무를 익히다 보면 시간도 잘 가겠지. 오늘 저녁에 진대리랑 커피 마실 때 진대리네 부서 분위기도 좀 물어봐야겠다.'


이렇게 생각을 정리한 후 승아는 메일에 답장을 썼다.


[재계약 제안 감사드립니다. 조금 생각해 본 후 인사팀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방문 전에 미리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메일을 발송하자마자 승아는 ver.3의 파일을 열었다. 오늘은 재계약에 대해 깊이 생각하거나 조사할 시간이 없었다. 오늘 꼭 이 보고서의 최종컨펌을 통과해야지만 제출기한에 맞출 수있다. 승아가 보기엔 별 것도 아닌 부수적인 것들에서 꼭 수정 요구를 받았다. 벌써 세 번째다. 승아는 수정을 할 때마다 버전의 숫자를 올렸다. ver.1에서 통과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만 승아만 그런 것이 아니라 부서원 모두가 같은 사정이었으므로 큰 불만은 없었다. 부장도 불안해서 그런 거겠지. 처음 올라온 대로 통과시키자니 자기가 하는 일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내용도 잘 모르겠고. 두세 번씩 수정하며 확인하면서 해당 보고서에 대한 내용도 확실히 파악하고 통과시켜도 될지에 대한 안심을 얻을 수 있는 것일 테다. 괴롭히려는 의도가 아님을 알기에 승아는 별 감정 없이 수정하라면 수정하라는 대로 시시콜콜한 것들을 수정한다. 제출기한에서 며칠 더 넉넉하게 준비해서 부장에게 가져가면 될 일이었다.


다만 부장이 승아가 생각 중요한 것들의 방향을 틀려고 할 때는 그대로 넘어가지 않다. 부장이 하는 말이 맞다는 것을 승아가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을 요구다. 대부분은 담당자가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합리적일 때가 많지만, 부장도 그냥 부장이 된 것이 아니기에 가끔은 부장이 제시한 새로운 방향이 합리적일 때도 있다. 그렇기에 승아는 스스로가 납득되기를 원했고 일단 납득되면 별 감정 없이 새로운 방향으로 수정다. 승아는 돈과 관련된 협상엔 젬병이지만 자기 업무에 대한 것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 2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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