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실에서 시간여행을 떠나다.

김장 후유증은 몸살만이 아니다.

by 시옷

안녕하세요.

시옷입니다.


저는 어제 시댁에 가서 김장을 하고 왔어요. 저 혼자라면 절대 엄두를 못 낼 일이지만, 시어머니가 재료를 다 준비해주시고 저랑 남편은 하루이틀치 노동력만 제공하면 1년치의 맛있는 김치를 얻을 수 있으니, 손꼽아 기다리진 않지만 그렇다고 그리 꺼려지지도 않는 연례 행사 중 하나입니다.

알록달록 단풍이 물든 산을 보며 시골집으로 가는 길도 신났고, 여럿이서 김치 양념을 만들고 배추에 버무리는 것도 재미있고, 저녁에 푹삶은 수육에다가 시원한 김치를 양껏 싸먹는 것도 너무 즐거웠습니다.

이런 기분과는 반대로, 비루한 몸뚱이는 하룻밤 자고 나니 팔이며 다리며 안 쑤신 곳이 없어요. 평소 책상 앞에서 손가락만 움직이며 키보드나 치다가 점심시간에 산책한다며 회사 근처를 한바퀴 도는게 움직임의 거의 대부분인 생활을 하다보니, 어쩔 수 없는 일 것 같습니다.

의학의 힘을 빌리고자 주말에도 문을 여는 약국을 찾아갔고, 약사님은 근육이완제와 진통제, 쌍화탕을 주시며 사우나가 큰 도움이 될거라고 하습니다.

시간도 늦었고 해서 욕조에 뜨뜻한 물을 받고 들어 앉아 있었습니다. 유튜브에서 '겨울에 듣기 좋은 음악' 찾아 틀어놓고 따뜻한 이불을 덮듯 물 속에 몸을 푹 담그니, 이것이야 말로 행복이구나 싶었습니다.

예전엔 저도 친구들며 동료들과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때론 진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걸 좋아했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혼자있는 시간도 참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이런 시간이 오히려 더 좋고 일부러라도 누리다고 절실히 느낍니다.

저는 예전부터 극 i 성향이라 언제나 혼자만의 시간을 좋아했었지 않았나 싶었는데, 기억을 찬찬히 더듬어 보니 20대에는 혼자 도서관에서 책을 보면서도, 마치 사색하고 깨어있는 대학생 같은 걸 하며 자신을 의식하였고, 사실은 그 시간이 외로워서 책에 집중하지 못하고 황하다가 결국 강의 끝난 친구 불러다가 카페를 가거나 호프집을 가는 그런 시절을 보냈습니다.

지금은 외근갔다 일찍 마치는 것처럼 일상에 잠깐의 틈이 생기면 신나서 도서관에 달려가 책을 읽곤 해요. 책 읽는 나, 멋지잖아? 하는 의식을 할 틈도 없이 짧고도 소중한 시간에 푹 빠져 틈새 도서관 타임을 보내고 옵니다. 예전엔 혼자서 긴 시간 잡생각과 싸우며 때 미는게 싫어서 목욕탕도 잘 못갔는데, 지금은 내 속도에 맞게 땀도 빼고 쉬기도 하며 사우나를 잘 즐깁니다.

20대 그 시절과 비교해 달라진 점이 있다면 지금은 사랑스런 남편과 아들이 생겼고, 혼자만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가족들과 함께 일상을 보내게 된다는 알고 있기에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겁니다. 혼자 있어도 혼자가 아니니까, 혼자 밥먹는 것도, 혼자 쉬는 것도, 혼자 노는 것도 그 재미를 로소 알게 된 것이지요.

그렇다고 가족들과 같이 있는게 특별히 왁자지껄 즐겁냐면 그것도 아닙니다. 드라마 속 가족처럼, 퇴근하면 아들이 엄마~하며 달려나오지는 않지만, 지금처럼 쇼파 옆에 나란히 앉아 각자 보고싶은 영상을 보다가 귀엽거나 재미있는 장면이 나오면 서로 이것 좀 봐봐, 하는 그런 시간들이 저에게 꽉찬 안정감을 는 것 같아요.

얼마전 회사에서 워크숍을 갔는데, 20대들과 어울릴려니 너무 어색해서 나 진짜 40대가 맞구나 싶었습니다. 2~30대를 한데 묶어 위안을 얻던 시절에서 마 지나지 않아서 내가 40대임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는데, 20대의 에너지를 사무실 밖에서 직접 느끼고 보니 나 40대 맞고 오히려 40대가 더 편해, 라고 인정하게 되었어요. 4~50대랑 같이 있는 저녁 시간이 되자 마음이 놓이고 그들과 대화가 더 잘 통하고 재밌더라니까요.

어제 다음이 오늘이고 오늘 다음이 내일인 시간을 았으니 난 예전과 많이 다르지 않을거라 생각했는데, 저는 많이 달라져 있었고 주위도 달라져 있었고 그걸 잘 맞추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요즘들어 도전정신 없이 너무 현재에 머무르려고만 하는게 아닌가?하고 나태한 나를 반성해야 하나 싶은 적이 가끔 있었는데, 이제 생각해보니 인생을 살며 나 자신과 환경의 주파수가 딱 맞아 들어가는 그런 시절에 접어든 것 같아요. 지금은 되려 목표로 하던 그곳에 다다른 것이니, 파랑새를 찾으러 다른 곳에 기웃댈 필요 없이 앞으로 십 년간(자식이 내 품에 있을만한 기간) 잘 즐겨보자 싶습니다. 새로운 도전이란 환경이 바뀔 때 자연스레 할 시기가 오지 않겠어요?

피곤한 몸을 노곤노곤 녹이다 보니 과거- 미래 몇 십 년을 거슬러 시간여행을 하게 되었네요. 내일부턴 다시 정신없는 평일이 시작될테니 슬슬 현생으로 복귀해 봐야겠습니다.


그럼 이만,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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