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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영철 Nov 21. 2021

21세기 귀족(6)

기원전 13~5세기 그리스의 토지사상의 변천

당신은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 믿는가?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합법적으로 착취하는 제도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는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폭력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신분제도는 그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경제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부동산제도'라는 이름으로.

 
 


  

- 프롤로그 -


 

지금까지의 카카오톡 브런치의 가장 큰 방향성과, 필자의 <21세기 귀족>의 방향성이 다소간 다를 것이다. 허나 브런치를 애독하는 독자들 중에 필시 깊은 학구열과 경제적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이 글을 올리는 바이다. 이 글 <21세기 귀족>은 필자가 지난 3년 간 개인적으로 연구해온 결과물이다.


이 글은 부동산 기득권층이 꼭꼭 숨기고 싶었던 부동산제도의 숨겨진 역사를 파헤치는 글이 될 것이다.




- 본문(5) : 기원전 13~5세기 그리스의 토지사상의 변천 -


허나 미케네 문명이 붕괴되는 마지막 시기까지 그러한 제도가 뚜렷하게 그 명맥을 이어온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 본토에서 침략해 온 도리아인에 의해 미케네 문명이 기원전 12세기 즈음에 무너지는 시기와 맞물려, 그리스는 철기시대에 진입하면서 기원전 8세기까지 무려 400년 동안의 암흑기(Greek Dark Ages)를 맞이한다.


외적 '도리아인'의 침입으로 철저히 붕괴당한 그리스 문명이 암흑기에 접어든다.(WikiMedia Commons)


그 기간 동안 인구가 급격히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요 국가체제와 도시와 건축물 등을 모두 포함한 문명 전체가 붕괴되었다. 게다가 그리스문자로 기록된 문헌이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 400년 간의 숨겨진 그리스 역사를 들여다 볼 수 있는 현존 사료들은 호메로스(Homer)의 <일리아드(Iliad)>와 <오디세이(Odyssey)>, 그리고 헤시오도스(Hēsíodos)의 <신들의 계보(Theogony)> 같은 몇가지 서사시들 정도뿐이다.


호메로스 흉상(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Homer-Greek-poet) 당연히 실제 그의 얼굴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 4세기 동안 그들이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으로부터 배우고 도입했던 토지사상은 그 어떻게 변해갔을까? 이에 대한 답은 당시 왕을 지칭하는 단어로 알고 있는 ‘바실리우스(basileus)’와 당시 다른 성격을 가진 두 가지 ‘땅(klesros와 temenos)’이 각기 가지고 있는 의미를 면밀히 포착함으로써 알아낼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바실리우스에 대해 알아보자.


지금까지의 우리의 통념과는 달리 그 지위는 전쟁 지휘관 및 영웅이었을 뿐, 강력한 행정력을 가진 자리가 아니었고 지방 수준의 실력자들에 불과했으며 왕이라는 칭호가 무색하게 꼭 백성을 그 치하에 두고 있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1] 더불어 인민들 대표하고 다스리는 정치적 활동도 거의 없었다.[2] 이를 통해 앞선 미케네 문명보다 더욱 왕토사상이 없다시피한 것은 물론이고, 중앙 권력이 인민의 토지에 대하여 간섭하는 정도도 크게 감소하였음이 추론된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그리스 문명권에서 토지소유권은 공권력으로부터 멀어진 덕분에 그만큼 강화된 것이다. 고로 토지사유사상이 강화가 확인된다.


다음으로는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두 가지 땅의 각각의 의미를 살펴보자. 먼저 ‘kleros’의 의미를 가진 땅인데, 이 땅은 왕이 하사한 땅이긴 하지만 모든 서사시를 통틀어서 다시 왕에게 환수되었다는 언급이 단 한 번도 없었고, 자연스레 일반 민중의 할당지도 다시 공동체에게로 환수되지 않았지 않은 땅이다.[3] 자연스레 개인의 땅은 자식에게 상속되기도 했다.[4] 철저한 사유재산으로 여겨진 수준은 아니지만 토지에 대한 배타적인 의식이 자라난 것이다.[5] 이에서도 토지사유사상이 강화되었음이 확인된다.


한편 ‘temenos’의 의미에서의 땅은 공동체(demos)가 공익에 기여한 개인에게 주는 “포상적” 성격을 가지며 왕과 관련된 의미를 가진 땅이었지만, 이 또한 지주의 사망 후 왕에게 다시 환수되지 않고 kleros처럼 자식에게 상속되었다.[6] 과거 미케네 문명 시기에는 분명히 “군사지도자”의 땅으로써 그가 임무를 수행하다가 후에 환수되는 땅이었지만 호메로스 시대에 들어 그 성격이 변질되어 왕령지 혹은 실력자의 사유지가 되어버린 것이다.[7] 이에서도 토지사유사상의 강화가 재차 확인된다.


이렇게 암흑기를 지나며 kleros의 의미에서의 땅과 temenos의 의미에서의 땅 모두 사실상 사유지로 변해버렸다.[8] 언급했듯, 이러한 변화는 중세 시대에 왕으로부터 토지를 하사 받은 기사(nights)들이 세대를 거듭할 수록 본래 왕 및 국가의 토지였음을 잊어버리고 사유화하며 공적 간섭에서 벗어나려 한 것과 매우 비슷하다.


종합하자면, 그리스 문명의 토지공개념과 역토사상은 도리아인의 칩임 이후에 퇴색하고 그만큼 토지사유사상이 강화되었다. 대표적인 에시는 기원전 5세기 전반 크레타에서 도리아인들이 만든 고르틴법전(Gortyn Code)이다. 내용 중 토지법제사적으로 주목할 만한 법은 아래와 같다.


V. (전략) 남편이나 아내가 죽은 경우에는 (10) 그 자식들이나 그 자식들의 자식들, 또는 그 자식들의 자식들의 자식들이 재산을 소유한다. 그들 모두가 없으면 (15) 사자(死者)의 형제, 형제의 자식들, 형제의 자식들의 자식들이 재산을 갖는다. 이들이 모두 없는 경우 자매, (20) 자매의 자식들, 자매의 자식들의 자식들이 재산을 갖는다. 이들이 모두 없고 근친이 있으면 그가 재산을 갖는다. 그러나 그 집의 (25) 근친(epiballontes)도 없으면 그 집의 토지(klaros)의 속하는 가속(Foikiai)들이 재산을 갖는다.[9]


근친이 전혀 없을 경우 재산을 국가나 공동체가 아니라 그 땅을 경작하는 가속(Foikiai) 즉, 농노들이 이를 상속받는다는 점에서 사유화된 토지가 국가로 환수되지 않음을 재차 알 수 있다. 또한 토지를 상속한 남성이 없을 경우 <함무라비 법전>의 29조는 그 토지의1/3만 여성이 상속하게 했으나, 위 법에서는 남성이 없으면 여성이 모든 토지를 상속하도록 규정했다. 토지에 대한 사소유권과 그 행사가 상당한 수준으로 고도화된 것이다.


다만 폴리스가 형성된 이후에도 토지가 ‘국가의 땅(politikē chōra)’이라고 불리기도 했다는 점으로 미루어보건대[10] 아직 토지 소유의 절대성, 배타성, 개인성은 근현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행히)적었다.


벽에 새겨진 고르틴 법전(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Gortyn_code,_ca_450_BC,_Gortys,_145816.jpg)





References


[1] 송문현, “호머시의 있어서의 “王”(basileus)과 政治組織”, 70~72쪽, 75쪽.

[2] 상게서, 91쪽.

[3] 송문현, “호메로스 세계의 土地保有 형태”, 「역사와 세계」15·16(1992), 4쪽.

[4] 상게서, 4~5쪽.

[5] 상게서, 8쪽.

[6] 상게서, 10~11쪽.

[7] 상게서, 13~15쪽.

[8] 상게서, 11쪽, 14쪽, 16쪽.

[9] 최자영, 『고대 그리스 법제사』(아카넷, 2007), 774~775쪽.

[10] 상게서, 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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