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영철 Nov 21. 2021

21세기 귀족(5)

미노아-미케네 문명인들의 인종적 기원과 토지사상

당신은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 믿는가?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합법적으로 착취하는 제도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는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폭력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신분제도는 그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경제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부동산제도'라는 이름으로.

 
 


  


  

- 프롤로그 -


 

지금까지의 카카오톡 브런치의 가장 큰 방향성과, 필자의 <21세기 귀족>의 방향성이 다소간 다를 것이다. 허나 브런치를 애독하는 독자들 중에 필시 깊은 학구열과 경제적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이 글을 올리는 바이다. 이 글 <21세기 귀족>은 필자가 지난 3년 간 개인적으로 연구해온 결과물이다. 

이 글은 부동산 기득권층이 꼭꼭 숨기고 싶었던 부동산제도의 숨겨진 역사를 파헤치는 글이 될 것이다. 



- 본문(5) : 미노아-미케네 문명인들의 인종적 기원과 토지사상 -


챕터 3 : 미노아-미케네 문명부터 아테네의 멸망까지, 고대 그리스의 토지사상과 토지제도


3-1 : 미노아-미케네 문명의 토지사상과 토지제도


그리스 문명의 아버지 문명 격이 되는 미노아 문명(Minoan Civilizaition)은 약 기원전 3300년경 지중해의 작은 섬 크레타에서 발생하였다. 약 천년이 지나 그 뒤를 이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발생한 미케네 문명(Mycenaean Civilization)은 고대 그리스와 에게 해 전체에 큰 영향을 주었고 선문자B(Liear B)[10]에 대한 연구결과로 그들이 고대 그리스인들의 문명적, 문화적 조상들이었음이 반 세기 전에 밝혀졌다. 근현대 아시아와 아메리카 등 세계 곳곳에 자신들의 토지사상과 제도를 퍼뜨린 유럽인들은 고대 그리스들이 유전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자신들의 선조라고 생각하는 믿음이 상당히 굳어 있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크레타 내의 '크노소스(Knossos)' 성(https://www.greekboston.com/travel/minoan-civilization-crete/)


그렇다면, 이 미노아-미케네 문명인들은 토지제도사를 알아보고자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문명인들이다. 허면 그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사람들이며, 과연 어떠한 토지사상과 토지제도를 가지고 있었을까. 과연 그것들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앞서 본서에서 살펴본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영향을 받은 것일까?


2017년 8월, 영-미의 다국적 연구팀(막스플랑크연구소)은 유럽인들의 유전학적 뿌리에 관한 매우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그 연구결과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미노아-미케네 두 문명 당시 살았던 시체 19구의 DNA를 분석해본 결과 고대 그들과 현대 그리스인들 간의 상당한 유전적 동질성이 확인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두 고대 문명인들의 조상은 신석기보다 수천 년 이른 때에 아나톨리아 땅, 즉 현대의 터키에서 넘어온 농부들로 보인다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고대 미노아-미케네 문명인들의 선조 중 일부는, 신석기가 시작되기 한참 전에 터키에서 넘어온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현대 유럽인의 피부가 하얀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의 조상 중 일부는 서유럽인과 북유라시아인도 있기 때문이지만, 고대의 중동 문명인들 또한 유럽인들의 조상이라는 이러한 연구결과는 큰 파장을 일으켰다. 


왜냐하면 여태껏 유럽인들은 그리고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왔던 전 세계인들은, 유럽대륙에서 크레타 섬으로 남하했던 미케네인들이 미케네 문명을 세웠고, 이것이 지중해에서 시작된 유럽 문명의 순수한 시발점이라고 보는 믿음이 무너질 위기에 놓였기 때문이었다. 대표적으로 20세기에 활동했던 학자 윌 듀런트는 미노아 문명을 두고 ‘연속된 유럽의 첫 고리’라고 주장하는 등, 유럽 학계와 유럽인들은 지금까지 수백 년 이상 자신들의 뿌리를 고대 그리스 밖에서는 찾지 않았고 후세대 유럽인들도 그렇게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문명이 타 문명들보다는 덜 야만적인 것처럼 보였고 그만큼 더 세련되고 발전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으리라.


허면 현재 터키와 코카서스와 아르메니아 그리고 이란 땅에 살았던 고대인들은 누구겠는가? 기원전 그곳에 살았던 고대인들은 고대 이집트 문명인들 중 북쪽으로 이동한 사람들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인들 중에 서북쪽 변방으로 이동하여 정착한 이들의 후손인 것이다. 결국 그들이 배를 타고 크레타 섬에 들어가 그 후손 격이 되는 미노아-미케네 문명을 그곳 현지인들과 함께 낳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탐구하고자 하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토지사상과 토지제도의 기원을 명확히 포착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을 것 같다.


필자는 ‘고대 그리스 문명은 근동문명으로부터 파생된 문명이다’라고 주장하는 마틴 버낼(Martin Bernal) 등의 학자들과 의견을 같이하여, 왕토제도가 근동 문명에 영향을 받아 도입되었다고 확신한다. 고고학적 발견과 자료에 근거하여 이러한 주장을 일찍이 내세웠던 학자 마틴 버낼의 주장 중 핵심적인 것들을 짧게 요약하여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11] 


1991년에 출판된, <블랙 아테나(Black Athena)> 표지(출판사는 미 Vintage)


그에 따르면 무려 기원전 3천 년경부터 그리스 경제사회는 이집트를 매우 닮았는데, 당대 이집트가 고왕국의 전성기임을 고려하면 이집트의 경제제도를 도입했다고 충분히 추측 가능하며, 또 실제로 이집트 유물과 레반트(현재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요르단) 유물로 보건대 에게해와 중동 사이에는 결코 적지 않은 교류가 있었다.[12]한편 크레타문명에 왕궁체제가 도입된 것이나 문명 내부의 사회조직의 동질성은 그들이 레반트 영향을 받았다는 명백한 증거이며 특히 전기 왕궁기의 크레타문명은 이집트와 레반트 등 중동 문명에서 갈라져 나온 문명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13] 시간이 흘러 미케네문명의 선문자 A, B가 기록된 문서는 미케네 왕궁의 경제사회가 근동과 상당히 세밀한 부분까지 일치함을 보이는데 결정적으로 21세에 왕궁이 처음으로 세워질 때부터 그들의 “왕궁 문화는 근동의 관료제에 완전히 물들었음이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14] 


또 한편 미케네문명의 중요 형성 시기인 기원전 18~16세기에는 이집트, 레반트, 에게해권 간에 접촉은 명백히 군사적인 요소가 있다는 주장이 있는데,[15] 이는 후기 청동기에 진입하고 단 수 십년 만에 군사주의적 경향이 심화된 것은 외래의 영향이 커 보인다는 한국내 역사 학자의 주장과[16] 상당히 맥이 일치하기도 한다. 또한 와낙스를 보좌한 행정가들이 지방을 다스리는 형태는, 근동의 히타이트 왕국과 유사하다는 국내 학자의 주장도[17] 버낼의 주장과 맥을 상당히 같이한다.버낼의 저술이 마르크스의 『자본론』마냥 다소간 결론을 미리 상정한 연구임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주장이 위와 같이 고고학 및문헌 증거에 기반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확정적 증거나 사료만 없을 뿐 미노아-미케네 문명의 토지사상과 관련 제도는 메소포타미아문명권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음은 거의 확실하다. 만에 하나 그렇지 않았다고 한들, 고대의 토지사상이 공개념을 띄고 있었다는 것은 주지했듯이 보편에 가까웠다. 

 

이제 본격적으로 미케네 문명인들의 생활상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어떠한 토지사상이 엿보이는지 확인해보자. 가장 먼저 확인되는 토지사상은 토지공개념이다. 그 첫째 이유로는 미케네 문명지에는 공유지(ke-ke-me-na)가 있었는데, 일차적으로 공동체(damos)가 이를 함께 공유 및 향유했으며 이차적으로는 개인들이 그 공유지의 일부를 임차하여 경작했었기 때문이다.[18] 물론 중앙 권력이 해당 공유지를 수용하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도[19] 토지공개념을 뒷바침해주는 역사이다. 더 나아가 공동의 소를 치는 사람, 공동의 돼지 치는 사람, 공동의 벌집 관리자 등이 있어 협동적으로 경제생활을 꾸려나갔는데,[20] 이에서 상당한 수준의 공동체적 경제체제가 있음이 확인된다는 것고 토지공개념의 방증이 된다. 공동의 소나 공동의 돼지를 사유지가 아닌 공유지에서 키웠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둘째 이유로는, 토지사유사상도 있어서 왕 및 고위 관료들은 상대적으로 사유에 가까운 토지 소유(ki-ti-me-na)를 하긴 했지만서도, 미케네의 고대 기록 어디에서도 그 토지 소유가 오늘날과 같은 절대성⋅배타성⋅개인성을 가졌음을 암시하는 기록이 아직까지도 전혀 발견된 바 없기 때문이다.[21] 오히려 위와 같은 수준의 토지공개념이 있는 사회에서는 토지양극화의 발생 가능성은 크지 않아보이므로 토지주권사상과 토지평등사상도 적지 않은 수준일 것이라고 판단된다.
 

다음으로 확인되는 토지사상은 (군)역토사상이다. 물론 중세 유럽처럼 행정적으로 명백한 봉건제가 정립되었다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봉건제의 원리와는 동일하다는 점에서 역토사상이 확인된다. 실제로 미케네 문명 당시 토지를 가진 자는 왕에 대한 봉건적 의무를 수행해야 했고 만약 그 토지의 소유권이 공백이라면 훗날 이를 취한 자가 그 의무를 이어나가야 하며 자의적 매각도 불가했다. [22] 결정적으로 왕과 가까운 고위 관료 ‘lawagetas’는 군 사령관(military commander)으로써, 사유적 토지 할당을 대가로 군사적 임무를 수행했었다.[23] 또한 다른 관료 ‘te-re-ta’는 임무 수행을 대가로 곡식 혹은 토지를 받았다는 점에서도 토지와 (군사적)충성을 매개로 하는 모종의 봉건제가 확인된다.[24] 즉 군역토사상이 결정적으로 확인된다. 



'고대 그리스의 장군'하면 떠올려지는 아가멤논(Photo : Xuan Che)


그 외에 주목되는 점은 왕토사상이 꽤 미약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미케네 내부 여러 왕국의 개별 수장인 왕 즉, 와낙스(wanax)가 가장 넓은 토지를 소유하며 신하와 인민의 토지 관계를 최종 조율 및 관리하긴 했지만,[25] 바로 아래의 군 사령관보다 밀을 3배 받는 것으로 보건대[26] 토지 소유에 큰 차이가 나지 않으며, 토지의 궁극적 소유권을 가진 것으로 보이지 않고, 무엇보다 다른 관료들과 “질적인” 토지 권리의 차이를 찾아볼 수 없다.[27] 명백히 군주제 국가였음에도 말이다.[28] 


그 지배계층이 현지인이 아니라 외부에서 도래한 이들이라는 배경이,[29] 필자가 생각하기에 강력한 왕토사상을 내세울 수 없었던 이유였다고 생각한다. 어쩄거나 중세 유럽의 게르만 왕국들에 준하는 왕토사상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 고로 노예를 제외하고는, 미케네 사회는 중세 유럽 사회처럼 윗 사람이 아랫 사람을 비참하게 예속시키거나 강제적 노역을 부과하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서판의 기록을 보면, 어느 대장장이는 자신을 비상시 봉건 의무에서 면제시켜달라고 당당히 요청했을 정도였다. [30] 중세 유럽에서 대장장이가 영주에게 그러한 주장을 했다면 그 다음 날 아내는 과부가 되었을 것이다.


한편, 바로 이것이 토지법제사적 관점으로, 그리고 본서에서 가장 주목할 핵심들 중 하나다. 위의 미케네 문명, 곧 후술하게 될 기원전 8세기 그리스 문명에서는 ‘국가공동체’로부터 토지를 할당 받아 가지고 있는 자는(설령 할당 받지 않았더라도 그 소유권을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자는) 역토사상에 구속되어 ‘국가공동체’를 위하여 공무를 담당해야 했다. 물론 가장 대표적이고 확실한 공무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군역이다. 굳이 중세 유럽처럼 뚜렷한 왕토사상, 뚜렷하고 체계적인 봉건제가 정립되지 않아도 그 (군)역토사상은 상당한 구속력과 실효를 발휘했던 것이다. 


후술할 것이지만 고대 그리스, 중세 유럽, 근현대로 나누어 위 구조 및 관계를 도식화하면 아래의 자료들과 같다.



약 천 년이 지나서 중세 유럽 문명에서는 ‘왕’으로부터 토지를 할당 받은 자는 역토사상에 구속되어 공무를 담당했으며 ‘왕’을 위하여 군사적 업무를 이행했다. 헌데 그 토지를 할당 받은 자는 자식에게도 이를 물려주기도 하며 큰 토지를 바탕으로 인민들을 자신에게 예속시키는 등, 토지사유사상이 전례없이 크게 강화되었다. 이를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허나 또 천 년이 지나서 근현대에 들어서 봉건제가 폐지되었다. 그러면 봉건제에 폐지 덕에 군역을 내려 놓을 수 있었던 지주들은 왕으로부터 군역을 대가로 받았던 토지를 국가공동체로 돌려주어야 했다. 만약 토지를 돌려주지 않는다면 적어도 다시, 혹은 계속 ‘국가공동체’를 위하여 공무 및 군사적 부담을 이행해야 했다. 허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지주들은 오롯이 토지 소유라는 권리만을 취하고 (군)역토사상이라는 부담은 저 멀리 던져버리고 외면했다. 이를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이 같다. 



왜 역사는 이렇게 흘러갔는가? 자세히 후술되겠지만 이는 바로 지주들이 근대 시민혁명 와중에 ‘봉건제의 악폐습을 폐지한다’라는 명분을, 봉건제의 순기능이자 인류 문명의 보편적 사상이었던 군역토사상에도 적용시켜 폐지했기 때문이다. 근대 시민혁명이 부분적으로 악용된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법령은 1660년 영국의 <봉건폐지법(Tenure Abolition Act)>이다. 물론 17~18세기 근대 혁명 기간 즉, 단기간에 이뤄한 변화가 이뤄진 것은 아니었고 중세에서부터 지주들은 이미 군역토사상의 구속과 효력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묘수를 부려오고 있긴 했다. 


위 세 이미지를 통해 미리 확인했듯이 유럽의 토지법제사는 지주들을 위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결정적으로 유럽인들이 17~20세기에 아메리카,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를 침략하며 자신들의 부동산제도를 다른 문명권에도 이식시키고 세계화시킬 것이다. 독자들이 바로 그러한 제도 속에 살고 있다.





References


[10] 선문자 : 미케네 문명까지 쓰인 고대 그리스의 음절문자. 선문자 A는 크레타 지역에서만 쓰인크레타어이고, 선문자 B는 미케네-그리스어(옛 그리스어)로써 더 넓은 지역에서 쓰였다.

[11] Martin Bernal, Black Athena : The Archaeological and Documentary Evidence/유재현 옮김,『블랙아테나2 - 고고학 및 문헌 증거』(소나무, 2012).

[12] Bernal/유재현 옮김, 상게서, 46쪽.

[13] 상게서, 270~272쪽.

[14] 상게서, 80쪽, 637쪽.

[15] 상게서, 522쪽.

[16] 송문현, “선(先) 그리스인과 그리스인: 두 차례에 걸친 도래”, 「서양고대사연구」52(2018.8), 93쪽.

[17] 송문현, “호머시의 있어서의 “王”(basileus)과 政治組織”,「서양고전학연구」4(1990.12), 72쪽.

[18] 송문현, “선문자B 서판의 사람들”, 21, 25~27쪽.

[19] 송문현, “뮈케네 궁전경제의 구조와 역할”, 77쪽.

[20] Michael Ventris & John Chadwick, DOCUMENTS IN MYCENAEAN GREEK(Cambridge Univesity Press, 1956), p. 134.

[21] 송문현, “뮈케네 궁전경제의 구조와 역할”, 56~57쪽.

[22] Ventris & Chadwick, 전게서, p. 233.

[23] 상게서 p. 120; 송문현, “선문자B 서판의 사람들”, 12~19쪽.

[24] Ventris & Chadwick, 전게서, pp. 120~121.

[25] 송문현, “선문자B 서판의 사람들”, 15~16쪽.

[26] Ventris & Chadwick, 전게서, p. 152.

[27] 송문현, “선문자B 서판의 사람들”, 15쪽.

[28] Ventris & Chadwick, 전게서, p. 120.

[29] 송문현, “선(先) 그리스인과 그리스인: 두 차례에 걸친 도래”, 94쪽.

[30] Ventris & Chadwick, 전게서, p. 293.

작가의 이전글 21세기 귀족(6)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