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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경미 May 30. 2024

존재만으로 꽃이 될 그들이 있음을

  

꽃이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이른 아침의 꽃시장을 찾는다. 그럴 때면 나는 종종 난관에 부딪힌다. 그건 바로 꽃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 꽃의 이름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아서 가격을 물어볼 때마다 애를 먹고는 했다.

장미, 튤립, 버터플라이, 마트리카리아, 양귀비, 왁스 플라워, 물망초, 그리고 또...(그만, 그만 하자.) 이미 사랑에 빠진 녀석들의 이름은 잊으라 해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잘 알아버렸지만, 세상은 넓고 꽃은 많다. 그래서 아직 이름을 알지 못하는 꽃들이 더 많다.

난생처음 본 꽃이 마음에 드는 날이면 수북이 쌓여있는 꽃 사이에서 그것을 정확히 지칭하기가 어려워 애를 먹고는 했다. 사장님은 손가락을 이리저리 옮기며 ‘이거요? 이거요?’ 하시고,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옆에요, 그 아래요’ 하며 정밀하게 손의 위치를 조정해야 했으니까. 그럴 바에야 꽃 이름을 알고 가면 더 좋을 것이었다. 그래서 꽃시장을 방문하기 전에는 숙제하듯 제철 꽃을 검색하며 마음에 드는 꽃의 모양과 이름을 달달 외웠다. ‘그 꽃을 파는 가게가 있으면 꽃 이름을 정확히 불러야지’ 하는 다짐도 잊지 않았다.

무엇보다 저토록 아름다운 꽃을, 여기저기 다 붙여 쓸 수 있는 이것이나 저것 혹은 그것으로 부르는 것은 꽃에 대한 예의가 아니고, 구매자의 도리 또한 아니다. 자고로 이름은 불러야 맛이고, 아름다운 꽃에도 엄연히 이름이 있으니 이름을 불러줘야 마땅하지 않은가.    


이름은 어디에나 있고, 그건 사람이고 동물이고 식물이고 예외가 없다. 지구와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에도 이름이 있다. 인간에 의해 붙여진 이름 말고, 그들이 그들끼리 부르는 이름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누구나 이름을 부여받는다. 스스로 붙인 이름이 아닌 누군가가 붙여준 이름. 이름의 주인이 그렇게 불리길 바라거나 스스로 정의해서 정한 이름이 아니라 누군가가 그렇게 정의했고, 그렇게 되었음 해서 붙인 것. 그것이 이름이다. 결국 이름엔 본인의 의지는 없다.


그럼에도 이름은 역할을 톡톡히 한다. 이름이 생김으로써 나를 나타내고, 내가 아닌 다른 것과 구별한다. 너와 나의 구별, 그리고 우리와 너희의 구별. 이름이 있어 나와 타인은 혼동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다. 


꽃시장에서도 이름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차이가 난다. 우선 당당하게 이름을 말함으로써 ‘나는 이 정도는 알고 있으니 아마추어가 아니오’ 하는 분위기를 풍길 수 있는데, 이건 단돈 몇백 원이라도 바가지를 덜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무엇보다 그 옆에, 그 아래 하며 시간을 소비하지 않아도 되니 이름이 있고, 이름을 아는 것은 여러모로 유용하다.


그러나 이름을 알고 있음으로써 한계가 되기도 한다. 어느 날, 다시 꽃 시장을 찾았을 때 나는 익숙하고 이미 이름을 알고 있는 꽃을 골라 들고 있었다. 이름을 알아서 생기는 내적 친밀감. 이름을 아는 것만으로 더 친숙해지고 없던 의미마저 생긴 것이다. 

내가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 한낱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그가 이름이 불리는 순간 꽃이 되어왔다는 시인의 문장처럼, 한때는 이름 모를 꽃이었던 꽃은, 이제 이름 모르는 꽃과는 다른 소중한 존재이자 특별한 존재가 되어 마음에 들어왔다.     


꽃이 마음에 들어와 자리를 잡는 게 문제 될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럼으로써 다른 꽃들은 안중에도 없게 되었다는 것, 일상에 변화를 주기 위해 찾은 꽃시장인데 결국 또다시 반복되는 같은 그림의 일상을 하나 추가하는 것이 문제였다.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문제는 자꾸 이름을 아는 꽃을 찾는 동안 다른 꽃들을 알아갈 기회도, 다른 꽃들과 친밀해질 기회도 모두 사라지는 것.     


삶도 마찬가지였다. 사는 동안 아는 것이 늘어날수록 의미가 생기고, 친밀감이 형성될수록 구분과 구별도 짙어졌다. 그렇게 마음에 경계가 생기면 그 너머에 존재하는 것들과 가까워질 기회는 없어지고 심리적 거리는 점점 더 멀어졌다. 결국 구별하는 것을 넘어 차별하기에 이르고 나니 물음표 생겼다. 이름이 꼭 있어야 하는 걸까.     


언젠가 뉴스에서 외국어를 남용하는 실태에 대해 보도하는 것을 봤다. 유명 건설사들이 아파트를 짓고 온갖 이름을 붙이는데, 이때 외국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한다는 지적이었다. 그런데 뉴스를 보며 무분별한 외국어 사용보다 마음에 걸렸던 점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을 부르는 이름이 만들어질수록 자꾸만 구분 짓고, 구별되는 세상이 되어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의도하지 않아도 차별이 이름에 담긴 경우도 있다. 초등학생 시절 내 크레용 상자에 스물셋의 친구들과 함께 담겼던 살색 크레용은 인종 차별적인 요소가 있다는 이유로 연주황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별로 써본 적 없는 단어인 연주황은 한자를 모르는 세대에게 차별적이라는 이유로 살구색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름에 담긴 차별을 발견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행하고 있던 차별을 시정한 사례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에 이름을 붙이고, 얼마나 많은 것들을 구분했을까. 얼마나 많이, 얼마나 자주, 몰랐다는 이유로 차별이 담긴 이름으로 대상을 불렀을까. 구분할 기준은 넘쳐났고, 구별할 특징들은 끝이 없었다. 하지만 구분 짓고, 구별하고 이름 지음으로써 내 영역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밤하늘의 별들만큼이나 수많은 아웃사이더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생각을 담는 도구인 언어에 불순한 의도가 감겨 있다면 이제라도 차별을, 그 불순한 의도를 제거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날도 역시 꽃을 사고 돌아오는 길. 이번에는 제철 꽃을 검색하지 않고 꽃시장을 갔던 터였다. 그리고 난생처음 보는, 이름 모를 꽃을 샀다. 물론 이름을 물어보는 습관을 떨쳐버리진 못했지만, 불행 중 다행인 건 나의 연약한 기억력과 그보다 강한 부주의함이 꽃의 이름을 머릿속에서 삭제시켜버렸다는 것. 그렇게 새롭게 모셔온 예쁜 꽃의 이름은 내 기억 속 다시 꺼낼 수 없는 무의식의 영역으로 사라져버리고, 결국 시장에서 데려온 ‘이것’을 화병에 꽂아둔 채 감상에 빠졌다.     


시간은 한참 흘렀고 그때 그 꽃이 꽂혀 있던 화병은 먼지를 뒤집어쓴 채 구석에 놓여있다. 그때 그 꽃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지만, 꽃의 모양과 색깔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리고 2주 넘게 화병에 꽂혀 있던 동안 꽃을 바라보며 느꼈던 감정 역시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있다.


어쩌면 이름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름을 몰라도, 그래서 내가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어도, 그들은 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 꽃은 이미 나에게로 와 한 송이 꽃이 되었으니까.

그 낯선 꽃 한 송이의 이름이 궁금했던 건, 내게 특별해진 꽃송이를 조금 더 기억하고 싶어서일 테니, 꽃의 이름에 기억 하나를 붙여 놓으면 언제든 쉽게 꺼내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테니, 그리고 명명(命名)함으로써 너는 다른 것과 다른 존재임을 인식하고 싶었을 테니. 이런 이유 때문이라면 이름 같은 건 몰라도 상관없다. 그때의 바람, 그때의 햇살, 그때의 네 모습과 내 느낌으로 충분히 기억할 수 있을 테니까.     


명명(命名)하지 않아도, 내 안으로 들어오지 않아도 혹은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존재하는 그대로의 가치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 날처럼 살아야지. 이름을 몰라도, 이름이 없어도, 구분 짓지 않아도 그 자체로 온전히 의미 있고 소중한 그것과 중년의 시간을 걸으며 기억 속에 쌓아가고 싶다. 


나는 기억 속에 켜켜이 쌓이는 그때 그것들을 가끔 꺼내 보며 함께 했던 순간들을 추억할 것이다. 나와 함께 했고 나와의 의미로 가득했던 그것을 나만의 소유가 아닌 세상과 공유하며 우리 사이에 알게 모르게 연결될 기억의 끈을 확장할 것이다. 구별과 차별을 넘어 공존하고 공유하는 경험. 그런 경험을 누적하고 싶으니까. 

끝으로 또 하나의 바람.

부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아름답고 사랑이 가득 담긴 이름으로 불러주는 중년이 되길. 증오와 혐오가 아닌, 존재에 대한 찬사와 온전함이 가득 담긴 이름으로 불러주는 사람으로 살길.



(사진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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