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경미 May 03. 2024

건강한 몸에 행복한 중년이 깃든다


나이를 먹을수록 또래의 사람을 만나면 종종 이런 대화를 나눈다. 예전 같지 않은 몸에 대해, 생전 경험해보지 못한 어떤 일을 경험하게 된 소회에 대해. 몸도 그중 하나여서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경험하게 만들고, 익숙했던 것은 낯설게, 낯설었던 것을 점차 익숙하게 만든다. 그런 낯섦에 익숙해지길 거부하는 건, 글쎄 과연 가능할까.     


이미 나보다 나이를 훨씬 더 먹은 중년의 선배들은 종종 말한다. 관절이며, 뭐며 성한 곳이 없다고. 그중 한 명이었던 어머니만 봐도 그렇다. 한참 전부터 일기예보다 비 오는 날을 정확히 맞추셨으니. 날이 궂거나 무리를 한 날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관절의 통증과 점점 줄어드는 키와 그에 비례하듯 찾아오는 통증. 그건 젊음이 빠져나가고 나이듦이 들어선 공간에 채워진 또 하나의 존재. 그런 존재가 찾아올 게 뻔한 게 바로 중년. 그래서 우린 모일 때마다, 시큰해지는 손목을 주무르며, 시린 무릎을 손바닥으로 덥히며 앞으로 길게 튀어나온 목과 허리를 ‘C’자로 만들어 보이며 말하곤 했다.

‘우리의 중년, 괜찮을까’라고.     


그러나 나는, 이미 디스크의 변화만큼은 그들보다 빨랐다. 점점 거북이를 따라가는 목의 사진을 맞이하며 제발 이 디스크를 중년을 이어 노년까지도 이어가길 바랐다. 이미 조금은 익숙해진 덕분이었을까.

오래 묵힌 병이 괜찮을 리 없음에도 디스크쯤은 감내할 수 있다, 수술만 안 하면 돼, 하고 묵히고 또 묵혔다. 그러다가 찾아온 허리 통증. 다시 낯설고 새로운. 이 새로운 고통이 뭔지 알 길 없어 함께 보낸 시간이 어느덧 한 달을 넘어섰을 때, 통증을 최소화하기 위해 움직이다 보니 모양새가 우스꽝스러워지는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자려고 누울 때조차 통증이 밀려오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정도의 통증은 경험해본 적 없고, 이 정도의 불편함은 느껴본 적이 없고, 이렇게 오랫동안 아팠던 것도 처음이라 어딘가 문제가 생겼어도 단단히 생긴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한 것 아니겠는가. 걱정을 끌어안고 찾은 병원에서, 그날 나는, 유연하게 C자로 휜 허리와 마치 징검다리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띄어 있는 척추뼈를 보고 있었다. 

의사는 짧은 탄식을 내지르며 자못 진지한 얼굴로 한동안 화면을 쳐다봤다. 저 표정은 어딘가 크게 안 좋은 게 분명했다. ‘선생님 제 허리는 이제 구제 불능인가요? 아, 아직 마음의 준비를 못 했는데.’ 손바닥에 촉촉이 땀이 차오를 무렵 의사는 굳게 닫혔던 입을 열었고, 내가 들은 첫 말이란, “허리가, 완벽한데요?”


의사의 폭풍 칭찬을 들으니 문득 떠오르는 옛 기억 둘.

한때 극심한 편두통에 진통제를 달고 살다가 역시 묵은 통증에 패배를 선언하고 병원을 찾았을 때, 그때의 의사도 이렇게 말했다. “혈관이 깨끗하고 좌우가 아주 대칭인 게 어느 곳 하나 흠잡을 데가 없네요!”

그리고 또 언젠가는 심장이 자꾸 두근거리고 통증이 찾아와서 찍은 심장 MRI 결과 역시 정상, 아무 문제 없다고 진단받은 기억 둘.     


문제가 없어도 문제는 있을 수 있는 몸의 신비를 경험하며 그렇다면 원인이 뭘까, 결국은 또 스트레스? 하면서 한숨을 푹 내쉰다. 스트레스 없이 사는 삶이란 아직 유토피아에 가까운 나이니까. 그러다 이런 생각이 또 스트레스를 만들어낸다고 자책하며 서툴게 화제를 전환한다. 무려, 내면의 아름다움에 대해.

언제나 입버릇처럼 했던 말 중 하나는 외면보다 내면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 그리고 또 숱하게 들어왔던 말은, 마흔 이후부터는 얼굴이 곧 마음이라는 말. 마음이 고우면 얼굴이 저절로 고와지고, 마음이 미우면 얼굴에도 고스란히 그런 마음이 담긴다는. 나는 마흔 이후의 내 얼굴이 지금보다 추해지지 않기 위해, 이왕이면 괜찮아 보이고 싶어서 마음 단속을 하고는 했다. 중년에는 책임져야 할 것이 한두 개가 아니구나, 하면서. 


그런데 여기 한번, 저기 한번, 그리고 또 거기 한번 찍으며 새로운 형태의 내면 아름다움 3단 콤보를 달성하고 나니 스스로 기특하기 짝이 없다. 여태껏 많이 망가트리지 않고 용케도 잘 보존해왔구나. 내면의 아름다움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더니, 이런 종류의 내면의 아름다움을 이뤘구나, 기특해하면서. 여태까지의 내가 증명한 ‘신종 내면의 아름다움’이란, 거울을 볼 때나 사진에 찍힐 때가 아니라 X-RAY나 MRI 같은 것들을 찍어야 볼 수 있는 것들.


그렇게 머리에 이어 심장, 심장에 이어 허리뼈까지. 내면의 아름다움 3단 콤보를 달성하고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돌아서는 길. 한없이 가벼워야 할 귀갓길이 묵직한 것은 여전히 허리가 욱신거리고 걸을 때마다 통증이 전달되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아름다운 내면들은 왜 여전히 고통을 선사하는 것일까. 무심한 통증의 원인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 원인을 탐색하는 데에는 진료실을 나오기 전 의사가 말해준 조언이 유효했다. 바닥에 앉지 말고 의자에 앉아라, 의자에 앉을 때는 양반다리를 하지 말라는 조언. 엎드려서 팔로 상체를 받친 채 있는 자세도 척추에는 좋지 않다는 조언도. 돌이켜보면 바닥에 철푸덕 앉는 것, 의자에 앉을 때 양반다리를 하는 것, 다리를 꼬는 것, 불 꺼 놓고 핸드폰 하는 것, 먹고 바로 눕는 걸 습관처럼 했던 것은 편하고 익숙했기 때문인데, 그런 습관이 몸에는 안 좋은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육체와 마음은 또 이렇게 다름을 증명한다. 마음이 좋아하는 건 몸이 싫어하고, 몸이 좋아하는 건 마음이 싫어하는. 본디 서로 힘을 합치고 마음을 모아 존재를 잘 살게끔 도와줘야 할 두 녀석은 오히려 취향이 정반대로 다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좋아하는 것과 좋은 것. 이 둘을 올바르게 정의하고 균형을 잘 잡을 수 있을까. 좋은 것을 좋아하면 좋겠지만, 좋아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님을 알았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도 이미 익숙해진 좋아하는 것을 미련 없이 포기하고 좋은 것으로 대체하거나 좋아하는 것이 나에게 좋지 않음을 인지하고 모든 부작용을 감내해야겠지.     


중년을 바라보는 나는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섰다. 몸을 따를 것인가, 마음을 따를 것인가. 좋은 것을 취할 것인가, 좋아하는 것을 취할 것인가. 어떤 종류의 배신감을 감내할 것인가.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면이 아름다운 사람의 갈등은 오래가지 못했다. 의사의 말을 상기하며 결심하고 선택한다. 익숙하고 편했던 것들과 이별하기. 더 늦기 전에 지금 지킬 수 있는 것이라도 지켜내기. 


마흔의 앞에 서 있는 나의 결심은 다시 오늘의 인내를 대가 삼아 미래의 편안을 소망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내 몸과 함께 건강히, 오랫동안 잘 지낼 방법을 찾아 기꺼이 따라줘야지. 그렇다면 벌떡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던 습관도,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던 습관도, 차가운 커피를 달고 살았던 일상도 조금씩 바꿔야 한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을 위해서도 나는 바뀌어야 한다. 매번 제멋대로 결론 짓고 화냈던 ‘승질’머리도, 혹은 지레 걱정하며 우울을 끌어안고 살던 성격도, 편하고 익숙하고 루틴 같았던 좋아하는 것들을 조금씩 고쳐야 한다.     


거기서 더 발전한다면 일상에서도, 관계에서도 좋은 것과 좋아하는 것을 구별할 수 있겠지. 내가 좋아해서 우리 관계에 좋은 것을 외면한 태도, 좋아하는 것을 하느라 하면 좋은 것들을 자꾸만 뒤로 미뤘던 게으름도. 찾아보면 아직도 고칠 것투성이, 언젠가 비보의 전조가 될 통증을 유발할 것들 천지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허리 통증은 내가 좋아하는 것과 헤어져야 한다고 신호를 보내는 것 같다. ‘이제 진짜 좋은 것을 해줘.’ 그래서 다시 하는 다짐.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는 내 몸과 마음에 좋은 것을 더 많이 선택하기. 나의 오늘이 조금 팍팍하더라도 그 팍팍함이 중년으로, 노년으로 이어지진 않을 것이라는 위안이면 이런 선택을 하는 것도 괜찮은 거래일 테니까.



<사진 출처: 픽사베이>

이전 05화 칭찬은 존재를 아름답게 만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