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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경미 Apr 25. 2024

칭찬은 존재를 아름답게 만든다

꽃을 샀다. 한때는 꽃을 사는 게 세상 쓸데없는 일이었고, 꽃 선물을 받는 것만큼 돈 아까운 일이 없다는 생각도 했다. 그럴 거면 차라리 책 한 권을 사서 주세요. 취향에 맞지 않더라도, 적어도 책장을 펴는 순간까지는 줄곧 설레니까요. 이랬던 사람이 변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이 정도의 취향 변화쯤이야 대수로운 일도 아니다.      


변화의 시작은 난생처음 방문한 꽃시장에서 맡은 싱그러운 꽃향기 때문이었다. 자연에 존재하는 다양한 꽃향기가 어우러져 기분 좋은 향을 풍기는 꽃 시장의 경험은 꽃 무용론자의 마음을 바꾸기 충분했다. 오랫동안 앓아온 비염으로 이런저런 냄새를 못 맡고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자연의 향을 맡은 경험. 아침 꽃 시장은 그 경험을 기꺼이 허락했고, 나는 꽃시장의 관용 속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며 신기해하고 즐거워했더랬다.     


그날부터였다. 꽃을 찾고 꽃을 그리워하고 꽃을 사게 된 것이.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르듯 꽃을 사고 꽃을 찍고 꽃을 꽂으며 꽃을 향유했다. 그러다 문득 ‘탐화(花)주의자’에게 찾아온 자연을 위해야 한다는 반성. 하지만 반성은 오래가지 못했고, 억눌러 놓았던 욕망의 나사가 풀리며 달려가 산 꽃이 지금 화병에 다소곳이 꽂혀 있다. 나는 유예된 만족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꽃을 들여다보고 있다.

노란 꽃잎은 마냥 사랑스럽고, 통통한 꽃잎은 여전히 귀엽고. 털이 난 짐승도 아닌데 자꾸 쓰다듬고 싶어지는 마음을 억누르며 꽃 곁을 서성거리다 꽃의 자태에 이끌려 순한 양처럼 꽃 앞에 고개를 처박고 한참을 있었다.     

꽃은 왜 이리도 이쁜 걸까. 장미의 두툼한 꽃송이도, 라넌큘러스의 비단같이 부드러운 꽃잎도, 달걀 프라이 같은 데이지도, 오동통 탄력 좋은 튤립도 제각각의 아름다움을 뽐낸다. 모양도, 색도, 질감도 모두 다른 꽃들은 예쁜 것과 예쁜 것이 만나 더 예쁘기 짝이 없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찬미하며 이렇게 이쁜 생명체가 어떻게 지구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이 모든 게 신의 조화라면 그 신은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존재이자 ‘미(美)’를 추구하는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이런 아름다움을 정말 신이 창조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까지 나아간다.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를 내라 하실 때 저마다의 뜻대로, 저마다의 개성과 취향대로 마음껏 뽐내며 생기지 않았을까. 꽃은 튼튼한 목재를 주는 대신, 먹을 수 있는 열매를 주는 대신 아름다움을 보는 동안 기쁘고 행복할 순간을 주길 선택했을 것이고, 나는 꽃의 선택과 희생을 향유하며 기꺼이 꽃 신봉자로 살아가는 중이다.     




꽃의 자태를 보며 꽃이 너무 예뻐 집으로 가져가기 위해 장미를 꺾다가 가시에 찔린 릴케의 일화를 떠올린다. 그의 인간다운 일화에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꽃의 아름다움에 다시 정신없이 빠져든다. 그런데 릴케는 정말 장미 가시에 찔려 죽음에 이르렀을까. 그렇다면 무서운 아름다움이지만, 어떤 것이든 감내하리라 다짐하며 꽃구경에 몰두한다. 말이 길어지기엔 꽃이 너무 아름답고, 아름다움을 문장으로 담아내기엔 능력이 비루하다.

그 아름다움을 ‘꽃이 너무 예쁘다’는 간결한 문장에 성급히 담아내고 또다시 꽃을 들여다보고 있다. 글은 점점 산으로 가고, 눈은 계속해서 꽃으로 가고. 이왕 이렇게 된 거 글이야 뒷전으로 미뤄놓고 질리도록 꽃이나 보자며 실컷 꽃을 들여다보다가 어쩜 저런 분홍색이 있을 수 있는지, 저런 분홍색이 어떻게 저런 노란색과 어울릴 수가 있는지 감탄한다.

   

‘어쩜 저렇게 예쁠 수가 있지!’ ‘어쩜 이렇게 생겼을 수가 있지!’

꽃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다 ‘어쩜 그럴 수가 있냐’는 말을 내뱉고, 이 말을 보통 칭찬할 때 썼던가 한다. 아니, 절대 그렇지 않았다. 더 고민할 것도 없이 이런 말은 화가 나서 누군가에게 따져 물을 때나 썼던 표현이지 않았던가.

‘어쩜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어? 어쩜 그럴 수 있어!’

이런 문장엔 긍정의 의미보다 부정의 의미가 더 많이 담겼던 것이 내 편협한 언어생활이었다. 결국 짧은 문장력은 모든 찬사를 담아낼 수 없어 익숙한 문장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의미를 담아 입 밖으로 터져 나온다. 강한 부정이 강한 긍정이 되는 것처럼 부정적인 의미가 더 컸던 단어를 이렇게 가져다 붙이니 강한 긍정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쩜 그럴 수 있는지 꽃을 예찬하다 문득 나를 그렇게 예뻐해달라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 목소리에, 나는 꽃을 탐미하던 시간에서 빠져나와 말속에 머문다. 마흔 가까이 사는 동안, 꽃에 찬사를 전하듯 누군가에게 찬사를 보낸 적이 있었던가. 여태껏 살아오는 동안 존재를 예찬한 적이 있었던가. 어쩜 너와 같은 존재가 있을 수 있냐며 감탄하고 고마워한 적이 있었던가. 미워하고 원망하고 분노하는 동안에도 이해하고 수용하고 소중히 한 적은 있었던가.

쑥스럽다는 이유로, 익숙해졌다는 이유로, 어떨 때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잣대로 나를 둘러싼 존재들에게 찬사는커녕 애정이 담긴 말 한마디, 걱정의 말 한마디를 아끼며 살아왔던 나를 반성한다. 이제 깨닫는다. 꽃이 아니어도 당신은 아름답고, 꽃이 아니어도 당신은 소중하고, 꽃이 아니어도 당신은 충분히 사랑스럽다. 꽃이 그러하다면 나도, 당신도 모두 그래야 한다.   

 



누군가 그랬다. 나이를 먹으면 점점 자연과 가까워진다고. 그리고 마음이 행복하고 평온해지면 자연의 경이로움에 감탄하게 된다고. 내가 마냥 행복하고 평온해서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자연과 가까워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나와 자연의 거리가 좁혀지고 만남의 빈도가 잦아질수록 나는 자연에 환호하고 찬사를 보내고 있다. 봄날의 개나리와 벚꽃에게, 붉게 하늘을 밝히는 달에게, 형용할 수 없이 물줄기를 쏟아내는 폭포수에게. 다만 거기에 인간이 없었다. 자연을 감탄하면서도 그 속에 함께 살아가는, 자연의 일부인 인간을 향해서는 애정 어린 시선도, 찬미가 가득 담긴 말도 없었던 것이다. 이제, 중년의 시간엔 인간을 향한 시선과 말을 담아보고 싶다. 빈약하기 짝이 없고, 편향되기 일쑤였던 말에 약간의 다채로움을 더하며 꽃을 보듯 너를 본다는 나태주 시인의 문장처럼 존재를 바라보는 눈에 애정을 담아 꽃을 보듯 너를 보고 나를 보고, 나와 함께 하는 우리를 보는 거다.


중년의 언어는 지금보다 더 부드럽고, 지금보다 더 적극적이고, 여태껏 뱉어온 말들보다 따스하고 친절한 말이길. 그리고 앞으로의 시선은 지금보다 더 깊고 다정하고 오래 머물길. 그래서 언제라도 꽃 같은 당신을 만나면 그동안 전하지 않았던 최초의 마음을 전할 것이다.

당신은, 나의 빈약한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가늠하지 못할 만큼 그렇게 대단한 존재라고, 아름다운 존재라고. 당신은 어쩜 그렇게 그럴 수 있냐는 짧은 문장에 존재를 향한 예찬의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말해줄 것이다.



(사진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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