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경미 Apr 18. 2024

사랑은 느끼는 거라고요


사랑은, 사랑을 담은 말이 입 밖으로 나와야 비로소 존재한다고 생각했을 때가 있었다. 한때의 연인에게, 인생의 동반자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며 사랑을 확인하고, 사랑의 크기를 측정하고 싶었다.


“나 사랑해?”

“그럼, 당연하지.”

“아니, 그렇게 대답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말해줘.”


문장 끝에 ‘사랑하지’라는 말이 붙어있지 않으면 서술어가 꼭 붙은 완성형 문장으로 말해달라며 사랑을 확인했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 싶을 만한 비유가 들어 있는 문장으로 대답해 달라고 졸랐다.     


‘손끝으로 원을 그려봐 네가 그릴 수 있는 한 크게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라는 원태연 시인의 문장이 이토록 오랫동안 회자 되는 이유는 이런 마음을 잘 헤아렸기 때문일 것이다. 명확하게 들어있는 사랑한다는 서술어와 사랑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비유까지. 이 완벽한 문장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걸 보면 사랑을 자꾸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나 말고도 이렇게나 많다는 방증이겠지. 그래서 나 역시 그가 시인의 시를 모티브로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내며 사랑을 고백했을 때(정확하게 말하면 반강제적인 고백이었겠지만) 입 밖으로 나온 사랑의 말을 통해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했고, 그제야 안도가 찾아와 얼굴이 한껏 밝아졌다. 사랑이 담긴 말 덕분에 비로소 나는 사랑 속에 있었다.


신기루 같은 사랑은 그래서 더 주고받기 어려웠다.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것이야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하지 않아도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지만, 사랑 같은 것들은 눈으로 볼 수도 피부로 느낄 수도 없어서 그것이 있음을 명확히 확인해주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을 있는 것처럼 정의해 단어로 만들어 놓은 것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더욱더 표현하고 드러내며 전달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더 쉽고, 빠르게 여기 사랑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말을 선택했다. 어떤 감각들보다 직관적이어서 주고받는 데 이만큼 편리한 방법이 없었다. 다른 감각들은 전달되는 정보를 유의미하게 처리해야 하고, 그것들 안에 담긴 의도와 의미를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번거롭기 짝이 없다. 게다가 일부러 더 관찰하고 발견하려 노력해야 하니 이런 시간과 노력이 부담스러워서 더더욱 말에 의존하게 됐다. 편하게 알고 싶고, 당신의 마음을 오해하고 싶지 않아서 ‘사랑’이라는 글자를 찾아 헤맸다.     


결국 이건 나의 한계가 되고 말았다. 내가 받을 수 있는 사랑을 줄이는 한계이자 내가 줄 수 있는 사랑을 제약하는 한계. 그리고 사랑을 주고받는 방법의 한계. 말이 주는 편리함이 좋아서 말이 충족해주는 감각에만 익숙해지다 보니 결국 받아들이는 정보도, 느낄 수 있는 것도 줄어들게 되고, 내게 보내온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알아차리지 못하고 허공에 흘려보내게 된 것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랑이 전달되지 못하고 허공에서 사라졌을까. 얼마나 많은 마음이 아직 발견되지 못해서 시간 속에 화석처럼 묻혀 버렸을까. 흘려보내고 놓쳐버린 마음들의 절반이라도 알아차렸다면 나는 지금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어쩌면 말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사랑을 수집하며 더 많은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누구나 다섯 개의 감각이 있다.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느끼는. 감각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을 다섯 가지의 감각 말고도 다양한 감각이 있다고 한다. 오감으로만 규정하기엔 우리가 느끼는 감각이 더 많고 다양하다는 뜻이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인간은 오감뿐만 아니라 다른 감각으로 느끼고 정보를 얻고 소통할 수 있는데, 나는 왜 하나의 감각에만 의존하며 미완성의 상태로 살았던 것일까.

  

이제부터라도 늦지 않았으니, 사랑을 더 풍요롭게 느끼기 위해 행간에 숨은 의미를 파악하며 책을 읽듯 행동과 표정과 몸짓에 담긴 의미를 해석해보면 어떨까. 오감으로 사랑을 느끼고, 오감으로 사랑을 전달하는 사람이 되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고 나니 무언가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미약하고 서툴지만, 어디에나 있고, 무엇을 통해서든 알 수 있는 사랑이 보이기 시작한다. 새벽녘 발밑까지 흘러내린 이불을 끄집어 올려 덮어주는 손길에, 놀이터를 뛰어노는 아이를 바라보는 눈길에, 한쪽으로 기울어진 우산의 각도에, 엄마를 보러 가겠다는 말을 듣는 순간 한 톤 올라가는 목소리에, 그리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풍겨오는 고소한 밥 냄새에, 집사의 허리에 꾹꾹이를 해주는 고양이의 발놀림에, 주인과 보폭을 맞추며 걷는 강아지의 발걸음에. 풍경, 냄새, 소리, 느낌에 담겨 있는 사랑이, 이제야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사랑을 보고, 사랑을 느끼고 발견하고, 사랑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그다지 예리하지 않은 감각으로도 느낄 수 있다. 사랑은 촉각에도, 청각에도, 시각에도, 미각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가만히 오감에 집중해보면 그동안 미처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과 생각들이 전해진다. 사랑을 발견하는 오감을 가지고 있다면,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 풍요로워진 사랑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사진 출처: 픽사베이)


이전 03화 외딴섬처럼 살고 싶지는 않으니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