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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경미 May 23. 2024

참을 수 없는 새들한 것의 소중함에 대하여


이불이 자꾸만 발가락을 걸었다. 이불에서 풀려나온 실밥에 걸린 발가락은 통증을 호소했다. 발가락에 고통이 생길 때마다 이불에 시선이 갔지만, 도대체 왜 그러는지 원인을 찾을 만큼 오래 들여다보지 않아서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불에 발가락이 걸리는 게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대수롭거나 의미 있는 일도 아니었으니까.     


신경 쓰고 살 게 얼마나 많은데, 이런 것까지 신경 쓰고 살아야 해?    

 

기억나지 않은 아주 오래전부터 신경 쓰는 삶을 살았다. 사회생활에서, 인간관계에서, 일에서, 그리고 나와의 관계에서. 독불장군처럼 살 수는 없기에 이런저런 신경을 쓰며 살 수밖에 없다는 걸 몸소 배웠다.


청년의 끄트머리에 이르러서야 신경 쓰는 삶이란 많은 에너지는 필요로 하는 꽤 피곤한 삶이라는 걸 배우게 됐다. 신경 쓰는 삶을 사는 동안 부지불식간에 피로가 쌓여서 문득 알아차렸을 땐 몸도, 마음도 묵직한 무언가에 눌려 있게 되었다. 그래서 신경 쓰는 삶이 주는 피로를 덜어내기 위해 최소한의 마지노선을 정해두고 신경을 쓸 것과 조금만 신경 써도 될 것과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것을 구분해놓고 살았다.      


삶은 ‘대수로운 것’을 중심으로, 대수로운 것들을 위해 돌아가야 하고, 발가락이 자꾸 불편한 것쯤은 가벼운 문제로 여기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내버려 둔 이불이 점점 문제를 일으켰다. 어쩌다 발가락이 걸리는 것을 넘어, 어떤 날은 제대로 걸렸는지 발톱이 빠져 버릴 것처럼 아팠고, 어떤 날은 발가락이 반대로 꺾여 뼈가 부러진 것처럼 아팠다. 

도대체 뭐가 문제길래.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자꾸만 발가락을 괴롭히는 이불을 들여다봤다. 

침대 매트리스 위에 얌전히 놓여있는 이불은, 천이 해지고 실밥이 풀려서 누빔이 터졌고 이미 찢어진 천 조각은 돌돌 말려 안에 넣어 놓은 압축 솜을 밖으로 훤히 드러내 놓고 있었다. 저 어딘가에 마찬가지로 대수롭지 않다며 대충 깎은 발톱이 걸리고 가끔은 운 좋게 발가락도 걸렸으리라.     

재생 불가능할 정도로 너덜너덜해진 이불. 닳고 해진 이불이 마지막 임무라도 부여받은 듯 자꾸 말을 걸어온다.     


“그래서, 공사다망하십니까.”  

   

생각해보면 매일 그런 일상이었다. 대수로운 것이 중요한 일상, 대수로운 것이 우선되는 일상, 특별하고 의미 있는 일들과 해야 하는 것들만 가득했던 일상. 이런 일상 속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저울질하며 더 무겁고 더 중요한 것을 먼저 하느라 어떤 것들은 항상 뒤로 밀렸고, 결국 이불 손질 같은 사소하고 별것 아닌 일은 언제나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해지고 너덜너덜해져서 완전히 망가져버릴 때까지.     


어느샌가 일상이 되어버린 루틴들로 인해 지금의 내가 양보하고 놓치는 것들이 있었다. 오늘, 지금 이 순간 내가 누린 것의 가치는 오늘의 인내를 먹고 자라 미래에 꽃을 피우는 것이 대부분인 하루. 이런 하루엔 자꾸 발가락을 괴롭히는 이불쯤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발가락이 자꾸 이불에 걸려도 나는 지금 책을 읽을 것이고, 글을 쓸 것이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미래에 찾아올 영광을 위하여. 그것이 대수로운 것들을 그에 합당하게 대하는 일이니까.

그러느라 자꾸 뒤처진 것들이 있었다. 사람들과 연락하는 것, 건강을 돌보는 것, 일상을 다듬는 것. 이런 것들은 저울질과 순위 매김에서 자꾸 뒤로 밀리기 일쑤였다. 가장 기본적이어서 사소해 보이는 일들, 이런 것들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특별한 일상을 위해, 조금 더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내는 것에 몰입하고 집중하고 있었다.     

애덤 스미스는 《도덕 감정론》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과대평가 된 미래와 과소평가 된 현재의 비극’에 대해 말한다. 저마다 이상과 욕망을 좇으며 노력하는 동안 현재의 내가 겪어야 할 육체적·심리적 학대(?)를 지속한다는 것이다. 

학대의 동기는 명확하다. 언젠가 찾아올 미래의 영광. 부, 명예, 성공 같은 과대평가 된 무언가를 얻기 위해 기꺼이 오늘을 희생하고, 몸과 마음을 바친다. 나 역시 그의 말처럼 미래를 과대평가하고 현재의 비극을 과소평가하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의 덫에 걸려서.     


이제야 해지고 터진 이불에서 팽팽하게 잡아당겨서 터져버린 내 마음이 보이고, 자꾸만 외면했던 현재의 비극이 하나둘 눈에 들어온다. 꿈, 미래, 이상 같은 대수롭거나 의미 있거나 중요해 보이는 단어들 말고, 지금의 나를 더 채워주는 새들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미래와 현재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지금 내가 할 일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핑크빛 이상을 좇아가느라 바쁘더라도 조금 시간을 내어보는 것이었다. 하루 5분, 10분, 그러다가 재미가 붙으면 1시간까지도. 내가 해야만 하는 것과 꿈꾸는 것만 하며 사는 게 인생의 전부는 아니니까. 나를 돌보고, 주변을 돌보고, 일상을 가다듬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다.     


앞으로 내게 얼마의 시간이 남아있을지는 모르지만, 하나 확실하게 아는 건 남겨진 인생의 시간은 다양한 것들로 채워져야 한다는 것. 잠시 쉬는 시간, 주변에 머무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가만히 사색하는 시간, 몸을 움직이며 건강을 돌보는 시간, 쾌적한 환경을 위해 청소하는 시간 같은 다양함이 가득할 때 그것이 진짜 카르페디엠을 실천하는 길이고, 새들한 것과 대수로운 것들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니 말이다.     


글을 쓰는 삶을 선택한 이후로 어느샌가 놓아버린 나의 소중한 일상들. 오늘은 그런 것들을 소외시키지 않는 하루를 보내야겠다. 글 쓰고 책 읽고 사유하는 삶만이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니까. 나의 일상에 오늘을 가져다 두는 거다.

오늘의 나야, 파이팅!



(사진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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