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의 아니게 마흔을 맞이할 날이 일 년 뒤로 미뤄졌다. 이제 정말 코앞까지 다가온 것 같았던 중년의 타이틀을 얻게 될 날에 일 년이라는 유예기간이 생긴 것이다. 그저 제도가 바뀌었을 뿐인데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대로 마흔이 될 수 없다는 불안감은 다행히도 옅어졌다는 것. 그리고 옅어진 생각의 틈으로 마흔의 나에 대한, 중년의 내가 살아갈 모습에 대한 고민이 뚜렷하게 자리잡았다. 이건 단순히 나이를 한두 살 더 먹고, 청년이 중년으로 바뀌는 것에 대한 고민이 아니었다. 오히려 삶에 대한 질문. 나이를 먹고 중년이 되어서가 아니라 삶을 더 잘 살고 싶은 사람의 고민이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가’ 하는 질문,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하며 유예된 시간을 보냈다.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 하루는 어제 죽어간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다.
이미 너무나 유명하고 익숙한, 그럼에도 나를 자꾸만 죄책감으로 밀어 넣은 소포클레스의 말. 이 문장 덕분에 나는 새롭게 살아갈 중년을 꿈꾸게 됐다. 그동안 살았던 것보다는 더 계획적이고 주체적으로 살아보자고 말이다. 그래서 사는 것답게 살아보고, 진짜 행복을 누르며 살아보자고 말이다.
시기상조일지 모르지만, 중년 이후를 생각한다. 새롭게 시작할 중년, 그 시기를 지나 노년에 이른 나는, 조금 전까지 살아온 중년의 시간을 무어라 정의할까. 혹시나 중년을 앞둔 청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대로 노년이 될 수 없다며 또 다시 안절부절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나 이런 경험은 한 번 한 것으로 이미 족하다. 같은 경험을 다시 반복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나의 미래가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자고, 노년을 맞이할 중년의 어느 시기의 나는 편안하고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그 시기를 맞이할 수 있는 오늘을 살자고 다짐한다.
나는 점점 낯설어질 지난날의 내 모습을 인정하고, 점점 내 것이 될 새로운 내 모습을 받아들이고, 그러면서도 더욱 발전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면서, 청년 시절에 꿈꾸었던 인생의 목적지를 하나하나 도달해나가면서 여러모로 결실을 얻는 중년으로 살고 싶다.
중년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청년에 이루지 못했기에 실패한 인생이 아니라, 이제부터 이뤄나갈 수 있는 시간과 가능성이 가득한 시기이다. 청년의 내가 느꼈던 불만족과 부족한, 그것들을 중년에 해소하고 채워나가다 보면 어느덧 나는 중년에 전성기를 맞아 인생 참 살 만하다고 말하게 되지 않을까. 그러면 이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올 것이다.
“내 나이가 어때서! 나는 내 나이가 참 좋아!”
(사진 출처: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