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구가 될까봐 걱정하고 있다면
호의(好意). 친절한 마음씨, 또는 좋게 생각해주는 마음이라는 의미는 가진 이 단어를 주로 베풀다라는 서술어를 짝궁처럼 데리고 다닌다.
호의를 베풀다. 그런데 이 짝궁이 썩 내키지 않는다. 베풀다는 말에서 주는 사람이 받는 사람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거나 나는 이 정도까지 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으스대는 모습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호의를 받는 사람은 또 어떠한가. 베풀다로 쓰이면 호의를 구하기 위해 굽신거리는 모습이 떠오른다.
성격에 의해서든, 의지에 의해서든 어찌 됐든 자의에 의해 드러난 호의가 굳이 베풀다라는 단어를 만나서 의미가 퇴색되고, 주고받는 사람 사이에 우열마저 결정 짓는다.
친절한 마음을 주고받는 게 뭐 그리 나쁠까. 사람 사는 세상, 온도를 높이고, 밝기를 밝히는 그런 마음. 있으면 있을수록 좋고,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게 바로 호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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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호의를 대하는 우리의 마음에는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종종 목격한다.
‘호의가 계속 되면 권리인 줄 안다.’
길고양이에게 밥을 줬더니 이튿날도, 다음날도 찾아와 고민이라는 사람에게, 돈이 없어 끼니 걱정을 하는 사람에게 밥을 드렸다는 사람에게 이런 조언이 종종 따라붙었다.
"조심하세요.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니까요."
조언 뒤에는 본인의 아찔했던 경험담이 이어졌다.
누군가는 다음날 고양이가 다른 고양이 친구들을 데려와 당황했고, 누군가는 주변에 공짜밥 주는 집으로 소문이 나서 당황스러웠다는 경험담이.
내가 이런 경험의 당사자라면, 나 역시 살짝 당황했을 듯하다.
호의를 받는 사람의 마음이 옹색해서, 혹은 그의 여건이 좋지 않아서 더 많은 호의를 바라는 것인가 싶어 호의가 권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도 충분히 이해는 되지만, 이런 생각들이 갈수록 호의를 보이기 힘들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싶어 마음이 씁쓸하다.
하지만 나는 또 정반대의 경험으로 잠시의 씁쓸함은 괜한 기우가 만들어낸 불필요한 감정일지도 모른다고 위로한다. 어떤 호의는 또 다른 호의로 돌아오기도 하니까 말이다.
수고하시는 택배기사님께 간식거리를 전해드릴 때 당신의 집으로 도착하는 물건은 더 신경쓰겠다는 말로, 돌이 들어있는 음식을 먹고 남긴 글에 기어코 음식을 다시 한번 보내는 마음으로 돌아오기도 하니까. 화내지 않고 위하는 마음이 느껴져서 감사했다는 메모와 함께 말이다. 바라지 않고 내보인 어떤 마음은 이렇게 뜻밖의 호의로 다시 돌아온다.
그렇다면 이 호의를 어떻게 해야 할까. 호의가 가득한 게 좋다면 호의에 대한 생각을 바꿔보면 어떨까. 호의를 베푸는 것 정도가 아니라 호의를 보이는 정도로 말이다.
보이는 것은 내 마음이 이렇다고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니 상대가 받든 말든 걱정할 것이 없고, 호의가 크든 작든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다.
호의가 보이면 느끼는 것이고, 보이지 않으면 그만인 것. 호의를 볼 수 있으면 다행이고, 볼 수 없어도 그만인 것.
호의를 보이는 그 미지근한 온도가 눈치채는 사람의 마음을 무겁지 않게 하니 부담이 없어 좋다. 베푸는 것처럼 거창하고 더 적극적이지 않다면 호의를 권리처럼 요구하는 사람을 만나도 마음의 부담이 훨씬 줄어들 것이다.
앞으로도 호의를 더 많이 보이고 살았음 좋겠다. 내가 보인 호의를 느낀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또 다른 호의가 되어 비춰질 수 있다면. 둥글게 퍼져나가는 호의의 파동이 일 수 있도록 아주 작은 돌멩이를 던져본다.
호의를 보이는 게 뭐 얼마나 거창한 것도 아니다. 택배 기사님께 음료수 하나를 건네거나 감사의 메시지를 보내는 일, 버스를 타면서 기사님께 안녕하시냐는 인사 한 마디를 건네는 일. 그 정도의 호의로도 보이기 충분하고 괜찮다. 호의를 주고받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호의가 권리가 되더라도 말이다. 호의가 또다른 호의로 이어지기 위해.
(Pixabay의 눈사람의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