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딸의 생일 케이크를 사들고 집으로 향한다. 차에 기름을 채우고 서비스로 생수 한 통을 받아들고, 아마도 행복해할 딸을 생각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향하는 길을 나섰을 것이다. 그런데 자동차가 터널을 지나는 순간 이상한 낌새가 느껴진다. 멀리부터 불이 꺼지더니 터널이 내려앉았다. 불행히도 남자는 붕괴된 터널에 영락없이 갇힌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남자는 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한 케이크와 주유하고 받은 생수 한 통으로 버텨야 한다. 누군가가 자신을 구해줄 때까지.
배우 하정우가 분한 영화 <터널>을 본 그 주 주말, 남편이 친구 결혼식에 참석한다며 장거리 외출을 했다. 그때 나는 영화의 내용을 떠올리며 혹시 모를 불상사에 대비하기 위해 생수와 초콜릿, 견과류, 보조배터리 등을 남편의 가방에 한가득 담아 보냈지만,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온 남편의 가방에는 내가 싸준 것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에겐 그다지 필요 없는 것들이었으니까.
인생 어느 지점에 찾아올지 모르는 사건 사고를 대비하기 위해 우리는 대비하는 일에 집중한다. 노년의 풍요로움을 위해 젊어서 부지런히 일하고, 언젠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해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버리지 못한다. 마치 한겨울을 나기 위해 도토리를 모으는 다람쥐처럼 양 볼 가득 이것저것, 꾸역꾸역 집어넣는다. 그러나 다람쥐는 어느 순간 깨닫는다. 양 볼에 가득 담긴 땅콩의 절반을 덜어내지 않으면 제가 원하는 곳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한라산에 오르기 위해 필요한 짐 목록을 작성하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다. 9시간의 등산을 위해 필요한 짐을 꾸리다 보니 30리터 등산용 가방 하나로는 턱없이 부족할 정도로 짐이 많았던 것이다. 등산용품부터 정상에서 먹을 간단한 끼니까지 챙겨가려면 그 무게 때문에 정상은커녕 대피소에 도착하기 전에 체력이 바닥날 것만 같았다.
결국 한라산을 가는 날, 나는 초콜릿 몇 개와 생수, 김밥 한 줄을 챙겨 산에 올랐고, 정상에서 먹는 따뜻한 컵라면과 커피믹스가 없어도, 몸을 따뜻하게 보호해줄 경량 패딩 없어도 등산의 묘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책 《인생의 절반쯤 왔을 때 깨닫게 되는 것들》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만났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이것저것 챙기느라 무거워진 저자의 가방을 보고 누군가가 “이 모든 것이 당신을 행복하게 해줍니까?”라고 물었다. 그러면서 쓸지 안 쓸지 모르는 것들을 이것저것 챙겨가는 건 짐이 될 뿐이라고, 정말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내려놓고 가라고 덧붙인다.
우리가 덜어내야 할 것이 비단 가방만의 일일까.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짐을 짊어지고 산다. 그 무게에 허덕이면서도 어쩔 수 없이 짐을 추가하고, 겨우겨우 버티는 인생을 산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세상에 왔으면서도 많은 것을 원한다. 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역할이 변할수록 짐은 오히려 늘어났고, 욕심을 채워지지 않았다.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모든 것이 다 준비된 도라에몽의 주머니가 달린 것처럼 이것저것 한가득 담아 짐을 지고 살았다.
그러나 내가 그토록 원했던 것들이 내 인생에서 정말 필요하고, 중요한 것들이었을까.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은 것들이 더 많았다.
내가 화려한 인생을 위해 추구하는 모든 것들, 그러니까 간단한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정도가 아니라 식후에 먹어야 하는 버터 향 가득한 빵과 알록달록 꾸며진 스티커와 반짝반짝 빛나는 고급 액세서리 같은 것들이 있어야만 나는 행복한 것일까. 나를 통제하고 억압하는, 그래야 한다는 생각들과 행동 방식들 그리고 사회의 규범 아닌 규범들, 손에 꽉 쥐어진 많은 재산과 학력, 명예, 좋은 집. 이런 것들이 있어야만 나는 행복할까.
가만히 내게 질문을 던지며 대답했다.
‘아니. 그렇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도 나는 그렇게 살았지.’
장거리 외출을 떠나는 남편에게 이것저것 싸서 들려 보낸 가방이 짐만 되었던 것처럼 내가 이고 진 것이 내 인생의 짐이라면 과감히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 한라산 정상까지 오르기 위해 정말 필요한 것이 아니면 내려놓고 떠난 그날의 후련함을 느끼려면 혹시나 하는 미련을 내려놓고 무엇을 가지고 갈 것인지, 무엇을 버려야 할지 과감히 선택해야 한다. 인생에 필요한 것은 많고, 중요한 것도 많지만, 꼭 필요하지 않는 것도 많고, 그렇다고 꼭 내게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 것도 많으니까 말이다.
앞으로 남은 내 인생의 길엔, 어느 것과 함께 할까. 무엇이 내 인생에 어울리는 것이고, 무엇이 진짜 필요한 것일까. 나는 무엇을 놓고 갈 것인가. 아니, 무엇을 들고 갈 것인가.
해야 한다는 고집, 성공에 대한 강한 집착,
나를 힘들게 하는 어떤 존재,
두려움, 걱정 등등.
오늘은 그것들의 리스트를 적으며 정말 필요하지 않았던 것들을 조금씩 내다버려야겠다.
그리고 내 마음을 정말 잘 알아주는 사람과 속 터놓고 대화를 나눠야지.
(사진 출처: Peter H from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