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글. 프롤로그
나는 꼬리표를 좋아했다.
나에게 붙는 꼬리표, 나에게 달린 상표, 나에게 메겨지는 가격.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의 모습을 가진 사람인지 한 마디로 수식할 수 있는 Tag는 그야말로 나에게는 때로는 인생의 목표이자, 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난 이후에는 나의 학교 이름이 나의 태그였다.
어떤 학교, 어떤 전공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으로 나의 많은 것이 설명되었다.
익숙한 사람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나의 학교와 전공이 그 어떤 것보다 나를 먼저 수식했고, 이것으로 나에 대한 그 사람들의 호감도 결정되는 듯 했다.
내가 대학 시절 가장 쉽게, 많이 했던 아르바이트는 ‘과외’였다.
과외야말로 온전히 나의 학교와 전공이라는 태그만을 가지고 얻게 되는 기회였다.
물론 한 두번의 수업을 하면 금세 그 밑천을 들통이 나버리기에 그렇게까지 간단한 문제는 아니겠지만.
사실 과외의 세계는 입장보다 유지가 더 어려운 법이니까.
그렇게 당시의 내가 가진 태그를 활용하여 비교적 쉽게 용돈을 벌 수 있기에 우연한 기회에 시작했던 과외는, 나의 대학시절 내내 유지되었다.
심지어는 내가 교환학생으로 한국을 1년간 비웠던 그 공백 이후에도, 과외 학생과 부모님이 나를 다시 찾아주어 그 인연은 한국 귀국 이후에도 쭉 이어졌다.
학교와 전공이라는 단순한 태그를 가지고 시작한 일이 ‘대학 시절 내내 5년 동안 꾸준히 한 집에서 찾아준 과외 선생님’이라는 나의 성실함과 실력을 반증하는 또 다른 태그가 되어주었다.
교환학생으로 1년의 시간을 유럽에서 보내고 귀국했던 2008년 가을, 휴학을 하지 않았던 동기들은 이미 취업을 해 있거나 열심히 취업 준비에 매진하고 있었다.
교환학생에서 프랑스어에 호기심이 생겨 프랑스로 어학연수를 떠나야겠다 다짐하고 귀국했던 마음이 무색하게, 친구들의 모습을 보니 왠지 불안해졌다.
나 혼자만 새로운 태그를 가져야 할 중요한 시기를 놓쳐서, 사회인으로서 그럴듯한 태그를 갖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 나를 괴롭혔다.
그렇게 나는 프랑스 어학연수를 포기했다. (이 후회와 미련은 추후 5년간 매년 파리로 여름 휴가를 떠나는 것으로 이어졌다.)
사회인으로서의 태그를 갖는 것은, 학생으로서의 태그를 갖는 것보다 내겐 훨씬 어려웠다.
원하는 학교와 전공으로 진학하기 위해서는 기준 점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가?
그에 충족하기 위해 나는 시간이든, 요령이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집중하면 되었다.
1지망의 학교는 아니었지만 괜찮다고 할 수 있는 학교에 들어갔고, 초등학생 시절부터 공부하고 싶던 전공으로 진학했다.
더 좋은 꼬리표를 원했다면 다시 한 번 도전 했을 수도 있지만, 그 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취업은 그렇지 않았다.
우선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기가 어려웠고, 깊은 방황과 고민 끝에 내가 원하는 것을 발견한 후에는 내가 원하는 길은 문이 매우 좁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한 기준이라는 것은 내가 알기 어려웠고, 어떤 것을 어떻게 얼만큼 투여하고 쏟아붓고 노력해야 내가 그 태그를 가질 수 있는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취업 준비를 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취업 준비의 시간이 길어지면 나에게 있던 방향은 공기 중으로 조금씩 새어 나간다.
나의 방향이라는 것은 조금씩 흐려지고 그저 남는 것은 ‘남들에게 소개할 수 있는, 매월 나에게 적정 수준의 급여를 줄 수 있는 곳’이 되어버린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왜 그런 곳에까지 지원을 했지’ 싶지만, 그 당시에 나에게는 어떤 곳도 상관 없었다.
그저 나에게 졸업 이후 공백 없이 꼬리표가 생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취업 했던 회사에서 나는 1년만에 퇴사를 결심했다.
나는 생각보다 태그가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는 것을 1년간 처절하게 깨달았다.
매일 퇴근 이후 내가 하고 싶었던 ‘창의력을 발휘하는 일’을 꿈꾸며 영화를 보고, 책을 쓰고, 글을 쓰며 시간을 보내며, 그렇게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잠들 수 없었던 그 시간들을 거치며 나는 내가 중심에 있는 삶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아무리 나를 포장하는 꼬리표가 화려하더라도 (사실 그 당시 꼬리표는 전혀 화려하지 않았고, 그저 회사원으로서의 안정감 정도만 느껴지는 꼬리표였다) 컨텐츠가 채워지지 않으면 나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었다.
신입사원으로 입사하여 1년간 나름 ‘똘똘한 신입’의 태그를 달고 지냈던 시간을 과감히 버리고, 나는 작은 광고회사 인턴으로 다시 시작했다.
컨텐츠를 만들고 싶다는 열정으로,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열정 그대로를 담은 ‘퇴사 후 인턴’ 이라는 꼬리표는 나를 들뜨게 하고 고무시키기에 충분했다.
인턴의 시간을 거쳐 나는 대기업 광고 대행사에 공채 지원을 하여 합격했고, 그렇게 ‘또래 여자애들에 비해 나이가 있는 중고신인’ 이라는 꼬리표를 달았지만 그래도 그럴듯한 꼬리표와 컨텐츠 두 가지를 충족하는 삶을 시작했다.
이 글은 나의 각종 상품 태그를 모았던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태그들을 모두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 글의 방향도 달라졌다.
인생의 흐름에 따라 바뀌는 태그들 속에서, 나라는 사람은 어떻게 변해왔을까?
내 삶의 태그와 내가 갖고 있는 가치의 관계를 솔직하게 풀어내 보고자 한다.
부디 재미없는 한 사람의 인생 스토리로 시작하는 프롤로그에서 독자들이 도망가지 않기를 바래보며, 본격적으로 택(tag)도 없는 인생을 이야기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