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死)의 두려움 보다 생(生)의 즐거움
꽤 오래 전의 기억이다. 아마 내가 고등학생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학교에 다녀와서 내 방에 들어가려고 하는 찰나 안방에서 어머니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했다. 어머니는 직장에 다니셨기에, 내가 집에 들어온 시간은 평소라면 어머니가 일을 하고 계실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대에 누워계시는 어머니가 보였다. 어머니는 내게 팬 하고 종이를 가져오라고 말씀하셨고 내가 가지고 돌아오자 자기가 하는 말을 받아 적으라고 하셨다.
'XXX 1000만원, XXX 1500만원...'
어머니가 돈을 빌려준 사람의 이름과 금액이었다. 나는 이걸 왜 말해주는지 물었고 어머니는 자신이 죽을 수도 있으니 너에게 말해준다고 말씀하셨다.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이해가 잘 안 됐다. 고등학생은 상황을 파악하기에 너무 어린 나이였다. 아니 그리고 죽을 정도로 심각하면 지금 집에 누워있을게 아니라 병원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집 근처에 큰 대학병원도 있는데 말이다. 몸도 머리도 굳었다.
어머니는 며칠 뒤에 집 근처에 있는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으셨고 아주 무사히 퇴원하셨다. 지금 생각해 봐도 아니 그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생각해도 굉장히 의아했던 게 왼손 새끼손가락 힘줄이 끊어지면 생명이 위험할 정도인가? 였다. 어머니께서 수술을 받으신 이유는 일을 하다가 왼손 새끼손가락 힘줄이 끊어져서였다. 수술이란 것이 당연히 위험을 동반하긴 하지만 이 정도 수술에 죽음까지 생각할 정도인가 싶었다. 물론 수술이라는 것을 처음이기도 하셨고 원래도 몸이 좀 안 좋으셨기 때문에 더 무섭게 느껴졌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렇게 시간은 더 흐르고 흘러 나는 20대 중후반이 되었다. 대학교를 다니면서 취업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주말에 있는 시험 하나를 보고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는 안 계시고 집에 아버지만 계셨다. 그리고 돌아온 날 보더니 아버지는 내게 '가자'라고 한마디 하셨다. 그래서 내가 '어딜?'이라고 묻자 아버지는 '병원'이라고 답하셨다.
갑자기 지난 약 한 달 정도 동안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평소와 달리 지나치게 예민했던 모습들... 지금도 생각나는 게 화장실 슬리퍼를 놓는 방향으로도 화를 내셨었다. 신발을 사람이 신기 편한 방향으로 두는 게 죽은 사람한테나 그렇게 두는 거라고 말이다.
어쨌든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은 원래 어머니가 다른 병 때문에 다니고 계시던 서울에 있는 큰 병원이었다. 어머니의 병명은 폐암이었다. 힘줄 끊어지는 것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무서운 병명. 정말 다행이었던 건 초기에 발견되었다는 것? 수술도 흉부외과 쪽에서 꽤 유명한 분이 맡아서 하게 되어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마무리가 되었다.
수술 이후 폐기능을 수술 이전처럼 돌리기 위한 훈련과 암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관리도 필요했는데 어머니는 정말 열심히 해내셨고 5년이 넘게 아무 이상이 없어 완치판정을 받으셨다. 그리고 지병 때문에 힘들어하시긴 하지만 지금까지도 나름 잘 계신다.
나는 궁금해졌다. 무엇이 엄마를 바꾼 걸까? 힘줄이 끊어졌을 때는 마치 모든 걸 체념한 듯이 나에게 본인이 돈을 빌려주었던 사람을 말씀하셨었는데(생각해 보면 이것도 참 슬프긴 하다. 일종의 유언인데, 다른 하고 싶은 얘기도 많았을 것 같은데 남겨진 나를 위해 그 순간에도 빌려준 돈에 대해 말씀하시다니) 이후 정말 죽을 수도 있는 폐암에 걸렸을 때는 그렇게 열심히 다시 살기 위해 노력하셨으니 말이다. 물론 당사자가 잘 계시기에 가서 물어보면 되긴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기로 하였다. 그냥 믿기로 하였다. 죽음의 두려움이 아닌 삶의 즐거움을 잃기 싫어서 그런 거라고 말이다.
살아가다 보면 힘든 순간이 계속해서 찾아오지만 어떻게든 넘기다 보면 또 행복한 순간이 찾아온다. 비록 아직까지 인생 전체에서 행복한 순간보다 힘든 순간이 더 많았다고 하더라도 남은 시간들이 있다면 그 시간들은 행복할 것이라고 기대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렇게 삶을 긍정하지 않는다면 내게 온 짧은 행복도 놓쳐버릴 것이기에 나는 나의 삶의 즐거움을 계속해서 찾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