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 오지라퍼

그 전화받지 마요

by 윤혜경
착하다 착한 클레로덴드롱 (어버이날 시부모님 집 앞 길거리 트럭에서 구입한 작은 나무가 자라 10년이 넘도록 꺾꽂이로 화분마다 번식 중)(꽃말: 행운)

엄마라는 사람인 나는 아주 자주 귀가 얇다. 내 사연으로 눈물이 샘솟는 탓에 누군가의 사연에 특히 약하다. 드디어 내 나라 서울에 정착한 지 몇 개월이 지났을까?


막 구입한 까만 승용차가 반짝반짝 윤이 나는 새 차 상태일 때 큰아이가 삼성역 학원을 가도록 가까운 지하철역에 내려주고 돌아서는데 1톤 트럭이 뒤에서 빵빵거렸다. 차창을 내리니 옆에 바짝 댄 트럭의 조수석 젊은 남자가 롯데백화점 가는 길을 좀 알려달라고 했다.


그리고 머뭇거리더니 사실은 자신이 백화점 생선 납품하고 귀갓길인데 납품용 제주 고급 생선이 조금 남았다고 했다. 그리고 김포 숙소의 기름값이라도 나오게 내가 한 상자라도 구입해줄 수 있는지 물었다. 2002년 월드컵 열리기 직전의 오월이고 사회 전체가 축제를 준비하느라 붕붕 거리던 시점이다. 해외에서 갓 귀국한 터라 남편이 송금해 준 급여 덕분에 잠시 여유로웠던 순간이었다.


어린아이, 안쓰러운 아내 사정을 심봉사의 딸 심청이처럼 풀어놓는 사연에 일시적으로 또 귀가 얇아졌다. 마침 현금이 넉넉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 현금이 없다"고 하니, "저기 모퉁이를 돌아가면 은행 ATM 기계가 있다"고 친절하게 설명하며 자기들이 "앞에서 안내 해 주겠다"고 했다. 내동네인데 나는 어릿하고, 백화점 위치를 묻던 그들은 돌연 지리에 밝았다.


이런 비상식적인 상황을 수용하는 시간이라니...

길을 알려주겠다며 2인 조 중 1인이 내차의 조수석으로 옮겨 앉아 딱한 경제사정과 김포공항 근처에 있다는 공동숙소의 열악함을 살짝 풀어 내 얇은 귀를 더 흔들었다. 길모퉁이를 지나니 진짜로 ATM 기기가 있는 부스 형태의 미니 은행이 있었다.


그곳에서 수표 2장을 찾아 건네주고, 생선을 원래 싫어하는 나는 안쓰러운 마음에 남았다는 생선 4박스를 모두 구매하기로 했다. 그들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아내와 어린 자녀에게 도움이 됟 수 있도록... 하여 새 차의 트렁크에 냄새나는 생선을 그들이 실어주는 대로 내다보지도 않고 기다렸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 장담대로 거저 얻은 셈이라는 고급 생선을 이사하는 과정에서 신세 진 사람들에게 나누어질 궁리를 하면서.... 한 달 식비에 가까운 고급? 생선 비용의 보람을 찾기 위해...


친구의 만류가 아니었다면 촌스럽기 그지없게 나는 냄새나는 생선을 고급이라는 제목에 속아서 딸아이를 처음 맡아 보살펴주시는 여고 담임선생님께도 보낼뻔했다. 이웃 동네에 거주하시는 시어머님과 근방에 사는 동생네와 나누었다. 생각보다 작고 실속이 없는 조기? (아마도 부세였을 듯...)와 제주옥돔 새끼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무지막지하게 많은 초록빛 해초와 함께 들어있었다.


사기를 당했음을 한 달이 훨씬 지나고서야 알았다. 그 한 달 동안 저렴하게 산 고급? 제주 생선으로 행복했었을게다. 생선에 문외한인 나는 판단 불가 수준이지만.... 제주산이 아니었을지도... 방송 뉴스도 안 듣고 사냐는 누군가의 한탄에 아.... 했을 뿐.


아직 귀국하지 못한 남편이 나중에 전해 듣고


"아..... 한글 사용이 편해지는 내 나라에 똑똑한 사람들이 너무 많네. 서툰 영어로 버벅거리지 않아도 되어 한껏 긴장이 풀어진 당신이 그들의 목표가 되었군... "


했다.


*만천홍 : 3개월을 애쓰더니 예쁜 꽃으로

(꽃말:행운이 찾아온다)

*7송이가 머물러서 두근두근 중인 행운으로


몇 년 전 어느 날의 평일 아침, 모처럼 아침을 먹고 커피를 여유롭게 마시려는 순간 걸려온 전화는 역삼동 농협의 지점장이라고 했다. 그리고 2년 전의 우리 집 주소와 현재의 내 주민등록번호를 정확하게 말하며, 농협 지점에 내 이름으로 통장을 개설한 손님이 한꺼번에 현금을 인출 신청하는 게 수상해서 지금 시간을 끌며 통장의 주인으로 적혀있는 전화번호로 나를 확인 중이라고 했다.


사기에 사용된 통장으로 보여서 이미 신고를 했으니 곧 검찰청에서 전화가 갈 거란다. 묻는 말에 잘 설명을 해야 나를 사칭한 사기꾼을 검거하고 내게 범죄 혐의 피해가 없게 된다고 했다. 지점장과의 통화야 그럴 수 있지만... 검찰청 검사가 전화를 해온다고? 통장 도용 범죄 혐의라니....


그리고 정말 검찰청 수사과라는 곳에서 검사 사칭 전화가 왔다. 모든 통장을 어딘 가에 옮겨놓아야 하니 개설되어 있는 나의 모든 계좌를 알려달라고 했다. 정확한 주소와 주민번호를 낯선 상대가 알고 있어서 나는 얼이 절반은 빠져나갔다. 그리고 외환은행과 한국 증권부터 모든 통장의 계좌번호를 불러주었다. 비밀번호를 불러주려는데 긴장한 까닭에 핸드폰을 놓치면서 하필 분리형 배터리가 분리되어 전화가 끊어졌다. 이 중요한 순간에...


남편이 들어와서 뭔데 그렇게 사색이냐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남편에게 얼굴을 찡그리며, 지금 검찰청과 통화 중이니 조용히 나가 달라고 손짓으로 무례를 떨었다.


그리고 분해된 전화기를 맞춰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수신 불가... 조급한 마음으로 키워드 '역삼동 농협'을 컴퓨터에 입력했다. 역삼동 농협이 한 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마음은 급하고 '역삼동 농협'이 들어간 이름의 지점은 너무 여러 곳이고... 역삼1동 지점부터 차례대로 전화를 걸어 조금 전에 분명히 역삼동 농협 지점장과 통화를 했노라며, 상황 설명을 서너 마디 들어가자마자


"사기당하신 거예요. 요즘 이런 문의 전화로 업무가 마비될 지경입니다"


고 덧붙였다

그래도 한 방에 정신이 제자리에 돌아오지 못한 나는 역삼동 소재 모든 농협에 차례대로 똑같은 내용의 통화를 하고 똑같은 대답을 듣고서야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영락없이 연탄가스를 마신 사람처럼 정신이 멍했다. 그리고도 한참 후에 생선 사기, 사골 사기, 전복 사기, 모피 사기 등 사깃꾼 뉴스들이 나오는데 영락없이 비슷한 유형들이었다. 몇 번이나 나왔었다는 뉴스를 그때 나는 처음 들었다. 그리고 정신을 바짝 차리려고 애썼다.


어느 날 지하철역 승강장에서 젊은 이가 오더니 방송통신대학교 학생인데 대구를 내려갈 차비가 없다며 돈 좀 빌려달라고 했다. 갚을 수도 없는 사람이 빌려달라는 말을 하는데, 나는 또 지갑을 열어 그에게 지폐를 건넸다. 젊은이가 차비가 없다는데 어른이 매몰차게 굴 일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잠시 후 고개를 돌려서 기차가 들어오는 쪽을 바라보니 조금 전에 내가 그가 말한 차비보다 넉넉하게 건네준 지폐에도 불구하고, 그 청년은 조금 떨어진 자리로 이동해서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있었다. 그제야 아차.... 했다. 그러고는 마음을 굳게 여미는 중이다. 사기를 당하지 않으려....


요즈음은 국가기관이나 은행을 빙자한 저리 대출 권유와 국가지원금 대상자라는 전화가 잦다. 핸드폰으로 KT와 고용지원금 지불 기관에서 "절대 기관이 먼저 개별 연락하지 않는다"는 공지를 보내오는 일이 잦아졌다. 이자가 많이 저렴하니 현금이 급하게 필요하거나 빚 독촉을 받는 사람은 넘어가기 쉽게 그럴듯한 홈페이지를 띄워 보내니 여전히 나처럼 귀가 얇은 피해자들이 대량 발생 중인가 보다.


한동안은 국제전화를 알리는 연변족 스타일의 한글 안내 멘트가 흘러나오며 당황스럽게 하더니, 요즘은 발음이 한층 세련되어 내국인과의 발음 구별이 어려울 지경으로 진화했다. 가끔 지인들이 사기성 전화들에 대한 정보를 공유해 주어 터무니없는 해외 결제 건 메시지를 받고도 이제는 놀라서 전화 거는 사기에는 넘어가지 않을 만큼 단단해졌다.


그러던 차에 국제전화라는 안내 멘트가 남편의 전화에서 울려 나왔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자료검색 중인 나는 서재로 들어가는 남편 등 뒤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요즘 그런 건 사기 전화니 받지 마요.!!!! 받지 않아야 한대요. 결제된데... "

했다.


일선에서 물러난 지 한참인 남편은 아내의 조언을 왕무시한 채 기어코 전화를 받는다. 그리고

"Hello~~를 여러 번 반복한다."

"아니 이~ 받지 말라니까는. 사기 전화라고!!!!!!!." 하는데


"Hi, How are you? "

"Great to hear you"


"??????"


통화를 짧게 하고 나오는 남편의 말인즉 예전 해외근무 시절 우리 아이들이 6~7살일 때 만난 성실한 현지 직원의 안부전화라고 했다. 회사에서 며칠 전에 누군가가 내 남편의 '연락처를 문의하는데 알려줘도 되는지' 묻는 전화가 왔었다는.... 그래서 조만간에 반가운 전화가 올 것 같아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기를 두 번이나 당하고 통장을 정지하고 재개설하는 등 여간 번거로웠던 경험을 한 나는 오늘 '빅 오지라퍼' 짓을 한 거다.


'너나 잘하세요~**'


이다.


적어도 남편은 한 번도 그런 어이없는 술수에 넘어간 적이 없는데, 나는 ATM 기계 앞까지 안내해서 수표를 건네준 사람이면서, 뭘 나설 거라고....


생선 사기 사건 당시 남편은 차 조수석에 사기꾼을 태워서 은행 ATM 기기까지 같이 가서 수표를 건네주는 무모한 행동을 한 아내가 납치당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며 끔찍해했었다. 사실 소공동 백화점 앞에서 명절 선물을 보자기에 싸들고 버스를 기다린 주부 납치와 인신매매 사건이 뉴스를 달군 적이 있었다. 후일에야 당시를 돌아보며 나도 등 뒤가 오싹했다.


나이 들면 입은 다물고 지갑은 여라는데...

집에서 나는 여전히 입부터 여는 독재자인가 보다. 오늘 전화를 걸어왔다는 국제전화의 주인공 아들 돌잔치에 갔을 때 한국의 70년대처럼 온 친척이 모여서 어린 아기의 첫돌을 축하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국제전화 안내 멘트 덕분에 모처럼 30여 년 전의 젊은 시간들을 다녀왔다, 점잖게 마무리한 남편 덕분에...


아, 나는 오늘도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하게 잘 지내기'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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