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를 닮아가는 오지라퍼

커피인데...

by 윤혜경

*만져서 코끝에 가까이 대어야 향긋한 '박하'처럼 사람의 향기는 나중에 나중에 기억 속에서 나풀거린다. (꽃말: 덕)


여고시절 칠순 중반이셨던 할머니는 늘 밥상머리에서 반찬을 이리저리 옮겨주다가 큰아들인 내 아버지에게 가끔 싫은 소리를 듣곤 하셨다. 귀한 대들보인 손자가 달걀찜에 젓가락이 두 번 가면 손녀들 앞 가까이 놓인 달걀찜을 사뿐히 들어서 대들보 손자 앞에 놓고, 다른 반찬들을 조금씩 이동하셨다.


50을 바라보는 큰 아들의 젓가락이 상 한가운데에 놓인 명란젓갈로 한번 가면 즉시 명란젓이 든 접시를 큰아들 앞으로 밀어주었다. 식사량은 적으신데 식사 때마다 자동반사 신경을 동원하여 반찬 그릇을 묻지도 않고 할머니의 판단을 기준으로 이리저리 서너 번은 옮겨서 처음에 차려진 위치를 유지하는 찬그릇은 아이들에게는 인기가 없는 간장종지 정도였다.


1970년대의 우리 집의 식사 풍경은 그러했다. 큰아들의 자손인 여럿의 딸들 속에 하나 있는 손자 호칭을 할머니는 '대들보'라고 하셨다. 그러려니 했지만 '계집애가 공부를 잘하면 뭐하냐? 우리 대들보가 잘해야지.'하시는 훈수는 유쾌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공부를 좀 많이 하셔서 깨어 있으신 편?이지만, 할머니의 생각엔 딸은 시집가면 그만인 남의 식구이므로 대들보인 손자가 손녀보다 공부가 뒤처지는 모습은 영 께름하다.


그런데다가 아들 손자는 딸처럼 사분거리고 손녀는 제 앞가림에 올인하여 까칠하니 더욱 그랬다. 할머니의 운좋은 대들보는 소문에 의하면 당시 대통령 아들 덕분에 시작된 제비뽑기로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배정받았다. 운이 덜 좋은 ? 우리학년은 중학교, 고등학교를 시험봐서 입학한 세대이다. 4시간 자면 명문학교 입학이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4당5락을 되뇌며, 공부를 한다는 아이들이 모인 여고에선 점심을 줄여먹고 책에 눈길을 주는게 유행인 시절이다.


월말고사 결과가 복도에 지극히 사적 정보에 해당하는 반, 번호, 이름, 점수, 반등수와 전교 등수까지 주루룩 붙곤해서 경쟁상대인 친구 점수까지 슬핏거리며 훑어보던.... 시험일이 다가오면 진땀을 흘리며 영문모를 배앓이를 심하게 했던 시절... 20점 만점의 체력장을 위해 윗몸 일으키기를 번개처럼 날릴때까지 매일 밤 열심히 연습하던 까칠한 손녀의 아련한 시간들.,.


그렇다 해도 늘 마음이 따스한 할머니는 손녀딸이 내리는 버스정류장에 마중 나와 서 계셨다. 행여 손녀딸 뒤를 뒤따라오는 더벅머리 남자 고등학생이 눈에 띄면 쫓아주려고.


요즈음 식탁에 앉아 겨우 세 식구임에도 어렸을 때보다 반찬 가짓수가 많다 보니 옛날 옛적에 할머니가 그러셨듯이 팔을 무례하게 뻗어서 남편과 큰딸 앞으로 반찬접시를 옮겨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할머니의 모습이 선하다.


할머니는 내게 식탁 앞에서만 눈앞에 선하게 나타나신다. 그리고 나는 할머니 대신 팔을 뻗어서 야채샐러드나 초장 종지, 머스터드 소스 등을 남편과 아픈 큰 딸의 취향에 맞춰 조금 더 가까이 옮겨주곤 한다. 아직까지 할머니처럼 가족에게 반찬접시 이동 건으로 핀잔을 들은 적은 없지만, 문득문득 식사 분위기를 깨지 않는지 멈칫거리기도 한다.


다행히 남편도 큰딸도 엄마의 뻗은 팔 덕분에 각자 다른 취향의 소스 접시 이동을 사랑이 가까이 온 것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큰 아이는 달콤 새콤한 초장에, 남편은 매콤한 겨자소스에 야채나 너겟 따위를 찍어먹는 걸 좋아하므로. 사실 요즈음 나는 논문 준비에 밤낮으로 코를 박고 있어서 남편과 딸이 집안일 전담 중이다. 그리하여 반찬접시 세팅이 다소 어설프다.


어쨌건 나는 벼슬 중이라서 식탁에 앉는 시간 외엔 기초 반찬과 가끔 특식 준비할 때를 빼고는 부엌 담당에서 벗어나 있다. 덕분에 남편과 큰 딸의 음식 실습이 잦아지면서 두사람의 솜씨도 늘어가는 중이다.


새벽 출근 시절에 밴 나쁜 습관이 퇴직한 지금도 이어져서 남편은 식사 중에도 물을 많이 마신다. 물에 말아 후루룩 거리거나 물 반 밥을 입에 넣어 삼키니 ... 내 물컵에는 늘 물이 찰랑거리고 남편은 자신의 물을 밥과 함께 후루룩거리고 나서 물이 부족하다. 나는 그럴 때 식사를 멈추고, 아직 손대지 않은 내 물컵을 재빠르게 들어 남편 컵에 절반쯤 추가로 부어주곤 한다.


마음속으로는 '밥을 매번 물에 빠뜨려서 급하게 후루룩 먹으면 소화에 좋지 않다는데.. ' 하지만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는 못하고...


어제 저녁식사 식탁 위 남편 수저 옆에 컵이 2개가 있다. 늘 그러하듯이 남편이 컵을 들어 마시고 식탁 위에 내려놓으며 두리번거렸다. 눈치 빠른 나는 내 따스한 물 잔을 선심쓰듯 그이의 컵에 숙여 빠르게 부어주었다.


"어, 이거 커피인데..."

아, 남편은 물은 이미 다 마시고 지금 막 내려놓은 잔에는 커피가 남아 있었다. 그곳에 나는 따뜻한 물을 채워준 거고...

오지라퍼 2탄이다.


그이는 웃으며 물컵으로 변한 커피잔을 들어 올려 마신다. 미안함이라니....ㅠㅠ

모르면 물으라 했는데.... 묻지 않고 내 판단으로 저지른 일들이 자꾸 사고가 된다. 정숙할 일인가 보다. 나이에 맞게 조금 둔해지기.... 이제부터 노력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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