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엄마가 바쁜 시간을 할애하여 백화점 진열장에서 어린 딸의 체형을 생각하며 요리조리 살펴서 모처럼 맘먹고 고가로 구매한 원피스를 한 번 입고는 다시는 입지 않겠다고 겨우 8살 된 작은 아이가 고집을 부렸다. 치마는 불편하니 다시는 입지 않겠다는...
작은 딸이라 계절마다 작아진 두 살 터울의 큰 아이의 옷과 운동화, 심지어 실내화까지 물려받고 아직도 대기 중인 옷과 실내화가 제법이다. 하여 모처럼 작은 아이만을 위한 새 옷 선물의 귀한 기회인데...
일 년 후면 키가 커져서 치마가 짧아질 것이므로 이 여름에 본전을 뽑을 요량으로 앙증맞은 그 원피스를 펼쳐 들고 권하고, 강요하고, 결국 옷을 아주 버리겠다고까지 협박을 내지르며 비열한 강온 전법을 다 써도 겨우 초등학교 2학년 짜리가 뜻밖에 요지부동이었다. 어린것과 힘겨루기를 하듯 내지르는 그 엄마의 심사를 저울에 달아보면 고약하기가 가볍지 않았을 터...
아무튼 엄마 의견에 맞선 어린 딸에 대한 첫 기억인, 그렇게 엄마 눈에만 예쁜 어린아이 원피스는 한 계절을 옷장에서 기다리다가 폐기되었다. 그리고 3년이 지나고 다시 해외 발령이 나서 이주를 하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금요일에 체육복 상하를 입었다. 시간이 흐르고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생이 된 작은 아이는 체육복 긴바지를 즐겨 입었다. 새벽에 학교 가기 전에 작은 아이가 소속된 학교의 소프트볼 팀은 동네 Oval 구장에서 주 1회 연습을 했다. 가끔은 그곳에서 다른 학교 팀과 시합이 열리기도 했다.
당시 시드니의 통합 high school (중고등학교) 아이들은 옷을 고등학교까지 오래 입을 수 있게 아예 고등학교 크기의 체육복을 건네받아 구입한다. 값싼 제품의 공급처인 중국이 부상하기 직전으로, 식품은 저렴하나 공산품이 비싼 편인 그곳의 구매방식이었다.
그곳 아이들은 방학이 끝날 때마다 머리 절반의 길이만큼 훌쩍 자라서 나타나지만, 유감스럽게도 내 아이는 그만큼의 속도로 자라지는 않았다. 그래서 날마다 쑥쑥 자라는 호주 아이들의 부모들은 자녀들의 교복과 체육복을 넉넉한 길이와 품으로 선택하는데, 덩달아서 권하는 대로 구입한 나는 내 아이의 옷을 너무 크게 입힌 짝이 되었다. 어쩌면 고등학교는 아빠 발령과 함께 한국에서 다니게 될 텐데...
어쨌건 하이스쿨의 커다란 체육복 바지는 기다란 바지의 끝 부분에 지퍼가 달려있어 지퍼를 내려 닫으면 고무줄 밑단이 오그라들어 길었던 바지의 길이도 볼만하게 조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아이는 큰 아이와 달리 당시의 유행에 맞춰 체육복 바지 아래쪽의 20센티쯤 되는 밑단 지퍼를 절반만 내려서 바지를 펄럭이게 입고 다녔다, 다른 아이들이 그러하듯이.
엄마 눈엔 딸의 체육복 바지자락이 길거리의 흙을 모두 쓸고 다니는 듯 보여서 지퍼를 끝까지 채울 것을 수차례 권했지만, 여름 햇살에 얼굴이 발그레 익어서 돌아오는 작은 아이는 집 가까이 와서야 현관문 앞에서 지퍼를 채우곤 했다. 이미 길거리 흙을 다 쓸어본 후에사... 운동을 하고 더워진 아이들이 그나마 시원하도록 너풀거리게 바짓단 지퍼를 잠그지 않는다는 것을 다른 엄마들의 이야기에서 들었다. 순둥이 두 딸의 엄마는 늘 뒷북이다.
그런 과정을 지나는 동안 엄마는 참 눈치가 없어서 아이들의 가슴에 가라앉은 색색의 멍을 읽어내지 못했다. 큰 아이가 어른이 된 후 몸이 아파 병원생활로 늙은 보호자가 된 엄마와 눈 맞춤 시간이 길어져서야 듣게 되었다. 돌아보면 사실 능력이 많지 않은 엄마도 좌충우돌 적응하느라 어설프기도 했지만, 뻑뻑한 학교생활에 낯설게 옮겨 심어진 아이들의 고단함을 미처 살피지 못한 보호자의 잘못이 크다.
대학 1학년 때 작은 아이는 미니스커트를 즐겨 입었다. 그 또한 엄마에게는 쇼크였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기부터 긴 원피스도 입지 않고 그저 바지만 입어대던 아이가 미니스커트와 부츠를 즐기는 숙녀로의 변신은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어지러웠다.
"엄마, 아이스께끼 알아?"
"아이스께끼?"
"내가 초등학교 때 바지만 입은 이유야."
"???"
"1학년 끝나고 겨울에 전학 왔잖아. 2학년 때 엄마가 사준 원피스 입고 학교에 간 날, 아마도 우리 반 남자 애들이었을 거야. 걔들이 긴 나뭇가지로 내 치마를 들어 올리며 '호주 캥거루'하고 놀렸어. "
"그때 애들이 너를 부반장으로 뽑아주지 않았어?, 남자 반장이 그랬어? "
"아니, 남자 반장은 착해. 다른 애들이.. 얼굴은 기억이 안 나는데 치마를 들추는 그 무례함에 숨이 막혔어."
"아. 그랬구나. 남자애들이 원래 짓궂어. 근데 왜 즉시 이야기를 안 했어? 엄마가 치마 입으라고 그렇게 혼낼 때 말하지... 엄마한테 치마 때문에 고스란히 당해, 왜?"
"그걸 엄마한테 이르면 선생님이 알게 될 테고... 모르는 사람까지 다 알게 되고... 단체 기합을 받게 되겠지.
그게 겁났어."
"내 일이니까 내가 바지 입으면 되는 일이고, 일을 크게 만들 필요는 없는 거였지."
엄마인 나는 그 당시에 남자아이들이 운동장에서 여자애들에게 얻어맞는다고 남자아이 엄마들이 여자애들의 드세짐 현상을 자주 말해서 행여 내 아이가 그럴까 봐 단속하기에 열중했다.
"친구들을 쥐어박거나 때리는 행동은 하지 마. 엄마가 아빠를 쥐어박는 거 봤어? 못 봤지? 운동장에서 여학생들이 남학생 뒤통수를 자주 쥐어박는다고 엄마들이 그러네. 넌 그러지 마. 그리고 혹시 얘들이 널 괴롭히면 선생님께 얘기해 " 하고 작은 딸에게 강조했다.
신체 가해 행동은 절대 금지인 문화에서 생활하다가 왔지만, 아이들은 금세 적응하기 마련이라 혹여 휩쓸리지 않도록 당부했다.
'아이스께끼...'
우리들이 자라던 시절에 고무줄놀이에 열중한 여학생들을 방해하려 지나가며 면도날로 고무줄을 자르고선 망연해 있는 여자아이들을 놀리고 깔깔대고 좋아하던 1970년대 어린 남학생들의 귀여운 심술이 여전히 대를 이어 존재함을 모르고...
어느 날 큰 아이는 가을 연노랑 점퍼 뒤에 "바보"라고 쓰인 포스트잇을 붙이고 돌아왔다. 하교 길에 많은 아이들의 눈길이 아기 손바닥만 한 크기의 포스트잇에 머물렀을 것인데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서... 딸은 오는 길 내내 "바보"를 달고 온 거였다.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수일 동안 생각 끝에 고작 담임교사에게 보고하는 것뿐이다. 귀여운 범인은 바로 뒤에 앉은 남학생이었다. 내게는 어리니 귀여운 범인이지만, 큰 아이에게는 황당한 가해자였다. 큰 아이가 그 아이를 비롯해서 누구도 괴롭힌 적이 없는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당했으니까.
'공평'이라는 것은 초등학교에서부터 어려운 실천사항이다. 그래도 실천을 위해 부단한 노력이 이어져야 하는...
두 아이가 무사히 성장해서 고마운 시간들이 되었지만, 학습부진 아동, 장애아동, 저소득층 자녀, 다문화가정이나 이주가정의 자녀들이 국내 학교에서 겪는 따돌림 등 어려운 일들이 뉴스에 나올 때면 우리 가족은 지난 시간들의 기억이 떠올라 공감력이 커진다.
모녀가 전공을 바꾸어 동물 응용과학의 박사학위를 마치고, 장애와 학습환경으로 인한 읽기 부진 아동을 위한 '동물매개 심리치료'와 '읽기 도우미견 프로그램'을 연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두 아이 모두 해외보다 국내에서 어른들과 아이들의 무례에 적응하는데 훨씬 힘들었다. 지금은 학급당 정원도 웬만한 선진국보다 더 적은 수로 줄어들고, 특수학급에는 보조교사가 있고 4~6명 수준이니 예전 한 학급 1인 교사가 40~60명 시절을 담임하던 때에 비하면 요순시대이다. 내 학창 시절엔 한 반이 68명이었던 때도 있었다. 또 사회문화도 다양성을 포용하는 수준이 높아져서 '드라마 우영우'가 나오기 전부터 다소 부진한 아동이나 사람을 기다려주고 포용할 줄 아는 사회가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상상불가의 데이트 폭력과 학교와 직장에서의 악한 따돌림과 괴롭힘에 상처를 입은 생명을 담보로 한 사고 뉴스는 멈출 줄을 모른다. 성선설과 성악설 중 하나를 선택하기 어려울 만큼...
아기를 키우면 무제한의 인내심이 필요하다. 적어도 아기 엄마는 다른 사람의 어려움에 대한 공감능력이 아기 양육과 함께 자란다. 마음이 따스한 작은 딸이 자신을 똑 닮은 아기를 키우면서 자신이 받은 사회의 혜택을 다른 이들과 공유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너 닮은 아이'를 키우며 매 순간 가슴이 벅찬 기쁨을 경험하기를, 그리고 아이의 인생을 위해 매번 많은 생각 끝에 결정을 하는 부모의 일이 얼마나 많은지를, 그렇게 어려운 출산과 양육을 모든 부모가 감당해서 이 고마운 사회가 유지됨을 인식하기를 기대하면서
"꼭 너 닮은 자식을 낳아서 키워봐~!
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기의 '아이스께끼 사건'이후 치마를 거부하며 바지만을 고집했다는 작은 딸을 똑 닮은 아기를 안는 순간, 작은 딸의 엄마가 느낀 '숨이 막힐 만큼의 환희'는 출산을 결정한 작은 딸 덕분에 경험했으니 다시 한번 참 고마운 '흥할 자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