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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장님이랑 왜 웃었어요?

단상에서

by 윤혜경



학기말 시험 준비기간 중에 당시엔 Sony, Sanyo보다는 글로벌 인지도가 낮은 편인, 이젠 세계적인 브랜드가 된 한국 전자회사의 세탁기 등 전자제품 매뉴얼 번역 의뢰가 번역협회를 통해서 들어왔다. 페이지당 매력적인 단가에도 불구하고 고민끝에 소심하게도 "나는 이과 전공이 아니고 교육. 문화, 병원관련 번역 전문이라서 기술계통 번역은 자신이 없다"고 응답했다. 돌아보니 ㅠㅠ이다. 단순히 세탁기 사용설명서였는데...


병원 통역의 경우 진료과별로 그리고 증상별로 예상이 가능한 고유명사들을 미리 준비해서 연습해둔다. 아님 풀어서 설명해야 되니 환자보다 통역사의 말이 더 길어진다. Silk worm(누에)이 비단실 풀어내듯 영어가 술술 줄지어 나오면 좋겠지만 불가하다. 정확히 그리고 간결하게 화자의 의도를 전달하고 원문의 표현을 빠뜨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는 시간제 아르바이트라도 하지 않으면 영어를 만나서 연습할 기회가 드물다는 데에 있다. 설령 아르바이트를 한다 하더라도 업무 집중도가 강해서 누군가와 말할 기회는 극히 드물고, 유학생의 경우에 총 근무시간제한도 엄격했다. 또한 한국식당 설거지 담당이나 호주 식당 계산원, 대형마트의 상품 박스 나르는 일, 매장 정리와 같은 단순노동이 많아서 정작 통역을 위한 수준 있는 영어 표현 기술을 익힐 곳이 없다는 데에 있다.


English Native Speaker가 천지인 현지에서 수준 있는 영어를 지속적으로 말할 기회가 드물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실망감이라니. 한국에 있을 때 영어 연습을 더 알차게 했었다는 생각이 들만큼 말하기 연습을 할 기회가 적었다.


영어 습득을 목표로 오스트레일리아 농장과 닭공장에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온 대학생들이 광활한 농장에서 사람은 구경도 어렵고, 닭공장에서도 각자 주어진 일을 마치는데 정신이 없어서 직원들끼리 영어로 말할 기회가 없었다는 푸념이 이해가 된다.


그들의 영어는 영어공부를 열심히 해서 한국을 떠나던 때보다 오히려 후퇴했다며 씁쓸해했던 상황이 조심스럽지만 이해가 된다. 그렇다 해도 현장감각만큼은 눈만 꿈벅거리다가 왔을지라도 도움이 된다. 교생실습처럼...


어쨌든 이미 결혼한 사람에게는 해당 없지만, 목표 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과의 결혼은 통역사에게는 일리가 있는 조언처럼 들렸다. 그렇지만 통. 번역이란 게 사실 모국어를 잘하는 게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리고 순발력이 중요하므로 보다 많은 표현들을 입술과 머리에 단단히 붙여놓으려면 양쪽 언어의 신문들을 잘 챙겨보고 책을 많이 읽고, 소리 내어 읽기 연습이 좋은 통번역사 되기에 도움이 된다.


아니면 통역 중에 필요한 단어인 '군인'이 순간적으로 떠오르지 않아서 입에서 '병졸'로 나올 수도 있다 (법정 통역 중 생긴 실화). 내 경우에는 결혼 후 한 번도 입에 올린 적이 없는 단어로 안방 한편에 단정히 놓인 낮은 장식장인 '문갑'을 표현해야 하는데 그 모습이 눈에 선한데도 '문갑'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우선 wooden box로 표현하고 보충설명을 하느라 속으로 낭패였던 기억이 있다.


졸업식장에서 호주 남자 친구와 행복해 보였던 어린 그녀도 국제결혼으로 성공적인 통번역사의 꿈을 이루었기를...


졸업식날 1시간여를 기다린 끝에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긴장한 얼굴로 단상으로 향하는 내게 중학생인 딸들이


"엄마, 넘어지지 않게 잘 보고... 조심하세요."


했다. 평소 단화만 신던 엄마가 6센티 굽의 구두를 신고 무거운 학위복을 걸쳐입고 술이 달린 석사모를 쓰고 벗겨질까봐 신경쓰며 걷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나 보다.


두 딸들은 신문에 날만큼 큰 교통사고 피해자로 사고 뒤처리를 아빠 없이 현지 변호사와 수습하며, 동승자였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입원하신 병원과 집을 다니느라 동시다발적으로 지친 엄마를 자주 안아준다. 더구나 눈이 큰 엄마가 긴장해서 두루 살피지 못하고 단상 위의 마이크와 스피커 줄 들에 걸려 우스꽝스레 넘어질까 걱정 중이다.


"그래. 잘 다녀올게"


오늘 큰 언니 같이 구는 어린 두 딸들과 눈빛을 교환하고 길게 걸어서 단상 위에 오르니 정말 바닥에 마이크 줄들이 여럿 이어져 있다. 눈을 크게 뜨고 무대 위의 마이크와 스피커 전선줄 서너 개를 주의하며 단상 중앙의 총장님을 향해 서툰 구둣발을 떼느라 조심조심 걸어서 마침내 총장님 앞에 섰다.


나를 초긴장시킨 범인은 남편이 한국 귀임 발령을 받은 후 떠나기 전에 나의 졸업식 때 신으라고 선물한 까만 에나멜 구두였다. 처음 신은 높은 굽의 구두가 카펫 위에서 미끄럽기가 ㅠㅠ


키가 아주 큰 총장님은 동양 여자인 내게 반갑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잔뜩 긴장한 40대 초입의 석사 졸업생에게


"학위를 받기까지 정말 힘들었지요? 수고가 많았어요. 열정이 참 대단합니다. 나는 영어밖에 못하는데 당신은 모국어와 영어를 모두 능숙하게 하니 부럽네요.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고 말을 건넜다. 학위를 건네주며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총장님 앞에서 웃음을 터트리던 앞서의 졸업생들처럼 나도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깨를 잔뜩 올리고 웅크려서 학위증을 받고 나서야 단상 위에 몰려있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넘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조금은 긴장을 낮추고 다시 조심스레 발을 떼서 계단들을 딛고 내리고 오르고를 반복해서 가까스로 제자리에 도착했다.


겨우 돌아와 긴장한 숨을 내쉬며 앉는 내게 두 딸들이


"엄마는 총장님과 무슨 말을 했는데 그렇게 웃었어요?"


라고 물었다.


나중에 단상 위에서 찍힌 사진속의 내 어깨는 긴장으로 한껏 웅크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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