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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깜짝할 사이에 해고되다

할머니는 집에 가도 돼요.

by 윤혜경


주 5일 어린이집 등원 중 돌봄 이모가 주 4회, 할머니가 주 1회 아이픽업에 참여한다. 그리고 비상시 아이부모, 친가와 외가의 조부모가 어린이집 픽업에 참여한다.


아이가 낮잠에서 늦게 깨어나 나올 때는 엄마와 돌봄 이모를 제외한 기타 보호자들의 픽업에 호의적이지 않다. 기타 보호자를 보자마자 "싫어~"를 소리치고 다시 교실로 달려들어간다.


그래서 아이부모는 미리 어린아이가 알고 있도록, 행여 노부모들이 눈썹만큼이라도 무안하지 않도록 누가 픽업 오는지를 아이와 어린이집에 설명해 둔다. 하교 준비 중 어린이집 교사는 아이에게 하교 픽업사항을 다시 부드럽게 알려서 아이의 마음준비를 돕는다.


"훈이가 금방 간식 부침을 제법 먹어서 저녁 식욕이 조금 낮을 수 있어요"


겉옷을 입혀주던 어린이집 선생님이 귀띔해 주었다. 훈이 저녁은 조금 늦게 먹여야겠다. 어린이집 마당의 차갑고 상쾌한 겨울바람을 느끼며, 애착인형인 주황색 라이언 자이언트의 한쪽씩 움켜쥐고 함께 걸어 나왔다.


안전한 픽업을 위해 아이네 차, 그리고 친가와 외가 승용차에 아기용 카시트가 설치되어 있다. 지난 추석에 본가에 가기 전날 아이 외가에 들른 아이부모가 급하게 당*마켓을 통해서 외가차에도 카시트를 설치하였다.


친가에선 처음부터 차에 아이용 카시트를 장착하고 매주 1회 아이를 픽업해서 돌봐주신다. 이번 어린아이용 카시트는 자세히 보니 많이 낡았다. 여러 번 손바뀜 했었나 본데 가격은 부드럽지 않다. 이후 두어 번 픽업 시 사용하고, 아이는 4개월 동안 금세 자라서 카시트 벨트가 뻑뻑해졌다.


오늘은 아이의 두터운 겨울 외투를 벗기고 티셔츠 위에 가까스로 안전벨트를 고정시켰다. 그리고 아이 무릎에 커다란 애착 인형을 올려주었다. 아이는 애착인형의 등에 얼굴을 서너 번 부빈 후 평화로운 표정이 되었다. 제 얼굴에 내 얼굴 비비기를 제안한다.


우린 보드랍게 얼굴 비비기를 하고, 차창밖으로 지나치는 각종 자동차 종류를 소리 내어 말했다. 덕분에 꽤 시간이 걸린 거리를 수월하게 왔다.


손발부터 닦고 나서 시원한 블루베리를 한 알씩 세 번 입에 넣어주었다. 알체리도 얇게 잘라 2알을 먹였다. 마지막으로 귤 1쪽을 반으로 잘라 입에 넣어주니 오물거리고 나서 활짝 웃는다. 그리고도 장난감을 만지작대는 동안 두유 1팩을 서서히 다 마셨다.


전기밥솥 디지털시계는 밥솥 밥이 27시간이나 지난 밥임을 보여준다. 세 가족 구성원 중 어린아이가 집에서 유일하게 저녁을 먹는다. 남은 밥을 꺼내고 밥을 새로 지었다. 전기압력솥 밥이 완성되고, 뒤섞어 공기층을 흔든 후 밥알 몇 알을 입에 넣어주었다. 아이에게 밥맛이 고소한 지 물었다. 아이는 입을 아기제비처럼 열어 새 밥알을 받아 넣고 오물오물 씹더니 미소가 떠오른다.


"맛있어요~"


아이는 식탁 위에 내가 미리 얹어둔 뚜껑 덮인 반찬통을 보았다.


"할머니, 밥 먹고 싶어요."


저녁식사시간이 6시인가 6시 반인가 기억이 가물거려서 아이엄마에게 오후 5시에 전화를 걸었다. 아이엄마랑 스피커폰으로 통화 중 영상으로 바꿔주니 금세 아이엄마 얼굴이 화면 가득 나타났다.


만 2년 8개월 된 아이는 핸드폰 화면에 나타난 제 엄마를 반가워하며 갑자기 화면 속 엄마의 코에, 눈에, 이마에 입술을 대어 뽀뽀를 퍼부었다. 그리고 손으로 엄마의 이마를 만지며 소리쳤다.


"엄마, 엄마다. 엄마, 할머니랑 밥 먹고 싶어요~^^"


12월 작은 딸의 유럽 출장 중 서울 밤 시간에 맞춰서 걸어온 영상통화에서 제 엄마를 보며 두 팔을 위로 올렸다.


"엄마, 안아주세요~"


나는 아이의 검지 손가락을 잡아서 핸드폰 화면 속의 아이 엄마 얼굴을 짚어보게 도와주었다. 통화 중 허전한 아이의 가슴에 핸드폰을 안겨주며 '꼭 껴안아도 돼!'라고 말했다.


아이엄마와 통화가 끝나고 여전히 헛헛해하는 어린아이를 내가 대신 안아주었지만, 아이에게 그다지 위로가 되지는 않아 보인다. 아이의 <엄마를 향한 진한 그리움>에 그날 밤 아기방에서 함께 지내며 덩달아 나도 마음 한쪽이 허전했다. 작은 딸의 해외출장 중에도 서울의 아이집에서는 딸이 떠나기 전에 미리 주중과 주말, 그리고 일요일 일정에 맞춰 세팅한 대로 아이 픽업이 이루어지는 중이다.


오늘 어린아이는 제 엄마와의 화상통화 후 어린이집의 맛있는 부침 간식 후유증 없이 저녁식사를 이른 시간에 시작하게 되었다. 빨간 김치에 관심을 보인다.


"김치는 많이 매워요? "


김치에 대한 호기심 표명에 하얀 김치대 부분을 물로 잘 씻어서 아기의 새끼손톱 보다 작은 크기로 잘라서 내놓았다.


'할머니, 안 매운 물김치 먹고 싶어요.'에 연말에 만들어 보낸, 비트 색감의 알배기와 사과 배 조각이 둥둥 떠있는 물김치를 아이는 좋아한다. 아이가 연한 핑크빛 물김치에서 세 잎 클로버 모양의 사과와 배를 작은 스푼으로 맛있게 떠먹는 동안, 나는 몇 알의 밥과 씻은 배추김치 조각을 함께 입에 넣어주었다.


"어때? 김치가 시원해?"


오물거리며 맛을 본다.


"네, 아주 시원해요~."


'맛이 시원하다'는 의미를 이해할까?


저녁을 먹고 나서 아이는 자신의 모형부엌 살림살이는 외면하고 부엌의 3종 스텐 냄비세트를 꺼냈다. 각기 다른 크기의 냄비들에 뚜껑을 맞춰보며 즐겁게 놀았다. 아이는 작은 발을 큰 냄비와 작은 냄비에 번갈아 넣어본다. 또, 작은 모형의 자동차들을 담아두고 뚜껑을 얹거나 냄비 옆에 나란히 놓으며 깔깔거렸다. 스텐 냄비를 만지고 놀며 ' 깔깔깔' 웃음을 터트릴 수 있음을 처음 알았다.


마침 작은 딸이 일찍 퇴근하여 밤 7시 즈음에 집에 들어왔다. 모처럼 일찍 퇴근한 오늘 밤에도 모자의 만남은 아주 여러 날 헤어졌다 만난 듯 진했다. 아이의 엄마를 맞는 반가움은 보고 있는 사람에게까지 퍼졌고, 작은 딸과 20일 만에 만나 덩달아 반가워진 나는 모처럼 아이엄마를 위한 밥상을 간단히 준비했다. 집에서 거의 밥을 먹지 않는 출근족 딸이 엄마가 준비한 간단한 집밥을 조금이라도 먹을 수 있게. 싫다던 작은 딸은 손을 씻고 한숨을 돌린 후, 아주 조금 담아준 밥과 미역국에 수저를 넣었다.


"밥 먹고 나서 아버지 커피 한 잔 부탁해. 내가 새 커피기계 작동을 못해서. 아버지가 커피 찾으시니 훈이가 달려와 기계버튼을 누르더라. 내가 코드를 아주 빼두었다."

퇴근하여 모처럼 막 밥을 먹으려던 딸은 일어서서 커피기계에 우유컵을 넣고 아빠를 위한 카푸치노부터 뽑았다.


'좀 나중에 말할걸 ㅠㅠ'


아기 픽업 임무가 끝난 남편은 이후부터 커피가 고팠었나 보다. 아래층 스타벅스 매장에서 내가 저축해 둔 쿠폰으로 커피 드시라고 제안을 해도 그냥 거실에서 커피가 고픈 채 독서 중이었다.


딸이 어린아이와 오늘하루 일과를 주고받으며 적게 담긴 식사를 예쁘게 마쳤다. 제 엄마의 식사가 끝내자마자, 아기는 좋은 사이였던 내게 말했다.


"이제 할머니는 집에 가도 돼요."


"??? 지훈이랑 자고 갈 건데?"


"안 돼요! 엄마가 왔으니까 할머니는 집에 가요."


할머니 돌보미는 눈 깜짝할 사이에 해고되었다. 자신이 그리워하는 엄마를 대신한 다른 보호자들의 드낙거림을 이해하고 있는 2년 8개월령 아이...


아이의 이를 닦아준 아이엄마는 쉴 새도 없이 아이 잠자리 준비차 아이 방의 조명을 약하게 조절하고, 아이가 선택한 커다란 그림동화책을 든 채 아이침대 옆에 앉았다. 조용히 현관을 나서는 우리들의 움직임을 알아챈 아이와 피곤에 젖은 아기 엄마가 부리나케 일어나 나왔다. 그리고 아이는 허리 굽혀 인사했다.

"안녕히 가세요~."


밤운전을 해준 남편 덕분에 차속에서 눈을 붙인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기의 호감을 얻고자 오랜만에 엷게 화장했던 피부를 정갈하게 씻었다.


4시간 돌봄이지만 어젯밤엔 어린아이의 오물거리는 입을 떠올리며 미리 밑반찬을 준비하고, 오늘 오전엔 야채를 준비하고 미역국을 끓여서 보온병에 담았다. 오후엔 아이와 놀며 가슴이 뛰는 시간을 보냈다. 어린 아기로 인한 미소, 웃음소리, 즐거움, 아이와 함께 했던 시간이 다시 눈앞에 펼쳐지며 마음 가득 행복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맞벌이 부부의 어린아이 양육에 뒤따르는 막대한 고단함에 내 생각이 길었다. 대한민국에서 직장업무와 퇴근 후 이어지는 엄마 임무의 무게에 눌린 직장맘의 24시를 보면 0.8명의 세계 최저 출산율을 극복할 방법이 참으로 요원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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