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2일 즉 '목. 금'에만 유아원에 가는 작은 아이와 함께 수요일에는 한국인 목사님이 진행하는 성경공부반에 등록했다. 한국인 가정주부들 대상인 성경공부에 참여한 15명 교인 자녀들은 대부분중고등학생이었다. 유아원에 다니는 아이를 둔 나는 30대 초반으로 가장 젊은 엄마 축에 속했다.
성경공부는 시드니에서 신자 수가 많은 교회 중의 하나인 J교회의 목사님이 호주교회 공간을 빌려서 2시간씩 진행했다. 우리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였다. 무엇보다도 외로운 타국 생활에 모국어 사용 성인들을 만나서 신앙심을 다지고 공통화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해주는 시간이다. 종교가 달라도 성경을 읽겠다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을 받아주는 따스함도 있었다. 그렇게 이웃 지인의 안내로 교회의 성경공부 참여자가 되었다.
날이 따스한 봄날에2시간의 성경공부가 끝나고 아이와 함께 돌아와 아파트의 현관문에 열쇠를 꽂으려는데 현관손잡이 느낌이 생소했다. 동그란 핸들이 어설프게 꽂아져 있다. 핸들에 열쇠를 꽂는데 핸들이 통째 건들거리다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리고 그 핸들이 빠진 동그란 구멍으로 집안이 들여다 보였다. 뭔가가 떨어져 있고 어지럽혀진 거실 분위기가 마치 영화장면처럼 눈에 들어왔다.이게 무슨 상황인 건가?
현관문의 구멍 뚫린 부분을 살짝 잡아다니니 열쇠도 필요 없이 문이 저절로 열렸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우리 집의 모습은 아주 생소했다. 거실과 방의 모든 서랍은 열려있거나 바닥에 내쳐져 서랍 안에 들어있던 내용물은 헤집혀지고 여기저기 던져져 있다. 마치 셜록홈스 추리소설의 한 페이지 그림처럼.
어린아이의 놀람을 배려할 겨를도 없이 성인인 내가 놀라서 정신이 얼얼했다. 결혼 예물이던 금제품들은 가져가고, Oroton 이미테이션 금장신구들은 현관으로 이어지는 복도와 거실에 던져두고 갔다. 다행히 당시엔 남편도 나도 결혼반지는 끼고 다닌 터라 결혼 예물 중 결혼반지들은 유일하게 살아남은 셈이 되었다.
두려움에 일부러 방 쪽을 향해 목소리를 크게 내며 작은 아이와 현관에 가까이 서서 대화를 시도했다. 혹여 안에서 '미처 도망가지 못했으면 빨리 나가라'는 신호로.
유리창이 열려 바람이 드낙거리고 있었다. 그럼 확실히 나갔다는 건가?
방 쪽으로 가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입구에 선 채 할 말을 영어로 메모지에 적은 뒤 경찰서에 맘먹고 큰소리로 전화를 걸었다, 도둑이 근처에 서성이는 중이라면 들을 수 있게.
경찰과의 통화에서 머쓱해하며 '나는 영어 말하기가 서툰 사람'임을 먼저 전했다. 그리고 메모지의 문장을 읽는 방식으로 <도둑의 침입>을 신고했다.
예상보다 경찰관의 방문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집을 방문한 키가 큰 남자경찰 2인은 호주의 관습대로 구두를 신은 채 집안으로 뚜벅뚜벅 들어왔다. 도둑 덕분에 정신없게 어지럽혀진 거실과 방을 둘러본 후 분실물 내역을 열심히 받아 적었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그들은
" 도둑맞은 물건을 다시 찾기는 아주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집안에 사람이 없어서 다치지 않아 천만다행이에요. 사람이 있었으면 강도로 변했을 거예요."라고 했다.
'물건을 찾기가 불가능하리만큼 어렵다'라고 단정하는 경찰을 보며 모국어로 의사소통이 편안한 대한한국의 경찰이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1990년대의 한국에서는 경찰들이 도둑을 잘 검거하여 주인에게 잃어버렸던 물건을 찾아 돌려주는 뉴스를 자주 접한 탓일 게다. 귀한 케이스이니 뉴스인 것을. 도둑맞은 물건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 내가 대책이 없는 거다.
'아, 운전연습 때처럼 어린아이만 혼자 집에 놓아두고 외출했다면 어쩔뻔했는가?'
문득 등이 서늘해졌다.
나는 내 집인데도 기다란 열쇠를 집에 둔 채 나온 날은 자동으로 등뒤에서 철커덕 잠귄 문을 열지 못하고 'Lock Smith'를 부른다. 평일에는 최소한 'A$ 60+ ~' 휴일에는' A$ 70+ ~'의 비용을 지불하고 문을 열어야 했었다. 남의 현관문을 맞는 열쇠도 없이 이렇게 잘 열 수 있는 도둑은 나와는 달리 그런 Silly 비용에 대한 고민 따위는 없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의 현관문 따는 재주만큼은 Lock Smith에 의존하는 나와 달리 적어도 60달러를 아낄 수 있을 테니 좀 부럽다.
경찰을 품 넓은 오빠쯤으로 기대한 내게 나의 고단한 영어소통 시도가 무위임을 자각하게 만든 제복 경찰의 대답에 힘이 빠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복경찰이 다녀간 덕분에 조금 위안이 되었다. 이국에서 누군가에게 쪼르르 일러바칠 수 있음은 이방인의 정서적인 불안감을 줄여주었으므로.
다른 층에 거주 중인 한국인 유학생 부부에게서 나중에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우리 아파트 2,3층의 여덟 가구가 한꺼번에 털렸다고 했다. 심지어 가죽 재킷 등 유명브랜드 옷도 훔쳐갔다고.
그 아파트는 주로 나이가 좀 지긋한 성인들이 주로 거주했다. 중학생 이하의 아이가 있는 가정은 두어 집 정도였다. 그곳의 아파트는 경비나 관리인 개념의 지킴이도 공간도 없다. 5~8층의 건물로 Flat으로 불리며, 주민들 각자가 키를 들고 건물입구 문을 여닫는다. 물론 1층 건물 안에는 앉아 쉴 수 있는 작은 소파와 큰 화분이 반긴다. 출입구 밖엔 호수별로 호출장치가 있는 <나 홀로 건물>이다. 주민들은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오르락거린다. 유럽 영화에 나오는 오래된 단독 아파트 모습으로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는 늘 어두워서 전등이 켜져 있다.
출퇴근하는 주민들의 일상을 적어도 상당기간 동안 살핀 후 집순이인 내가 정기적으로 2시간여 집을 비우는 수요일로 시간 계획을 세웠을 거라는 말에 내 머리카락이 쭈뼛거렸다. 우리 집이 마지막 집이었을 거라고 했다. <주민이 돌아오고 있다>는 신호를 아파트 입구의 망보기로부터 받고 우리 집을 털던 일당들이 귀금속 일부를 떨어뜨리며 급하게 빠져나간 것으로 추정된다고 아파트주민대표가 말했다나.
다행히 비상금을 집에 두지 않고 가방에 담아 외출했으니 모처럼 한 가지는 잘한 거다. 현금을 주로 사용하던 시절이었다. 짧지 않은 가방끈에도 불구하고 해외 ATM 기기 앞에 서면 비문해자 수준이었던 나는 월급 다음날이면 한 달 치 식비 외에도 현금을 한 번에 넉넉하게 찾아 봉투마다 구분해서 담아두고 아이들의 '발레, 수영, 도서구입비, 간식비, 유치원비, 그리고 학교 등에서 필요한 크고 작은 지출에 사용하곤 했다.
나중에 다른 한국인들과의 대화에서 시드니 거주자들에게 좀도둑 경험은 부지기수이며, 길거리에서 핸드백을 날치기하는 일도 있으니 길을 걸을 때는 조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사람 사는 동네는 어디나 비슷한가 보다. 궁하면 남의 담을 넘을 수밖에 없는 절박한 사정들이 생기고, 더러는 이게 취미나 특기가 되거나 아예 직업으로 장착한 이들도 있는 게 우리가 사는 인간사회인 것을.
나는 시드니의 엘리베이터와 길에서 미소를 지으며 숱하게 나누는 낯선 이들의 상냥한 눈인사와 'Morning~! '나눔에 홀려있었다. 하여 선진국 살이에 호기심만 장착한 채 턱없이 <가드>를 내려놓았었다.
한국에선 경찰서 앞을 지나다니긴 했지만, 내부는 드라마나 영화에서만 본 적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내게 경찰은 젊은 시절 만화 속의 팔이 빵빵한 뽀빠이아저씨처럼 <경찰관아저씨>라는 정겨운 호칭의 대상이다.
<기어이 다녀가신 분들> 덕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찰서에 빈집털이 현장을 신고했다. 도둑이 헤집어놓은 풍경의 집에서 경찰관들의 방문을 받아 편치 않은 영어로 상황을 설명하면서 한글사용의 모국이 더욱 그리워졌다. 남의 언어로 설명하는 매일매일 나는 소통장애를 겪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