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메모들로 옛 기억을 등장시켜 주는 고마운 가계부. 해외살이동안 친정부모님이 맡아주신 국내 짐들 속에서 안전하게. 도처에 민폐 끼친 결과물을 이제는 정리할 때인가 봅니다.
"우리 엄마는 운전할 수 없어요?"
"아빠가 우리 차를 가지고 출근하시면 엄마는 차가 없어. 그래서 석이 아줌마께서 너희를 수영장레슨 다닐 수 있게 차를 태워주시는 거야"
어린 두 딸이 친구 엄마의 봉고차를 타고 함께 수영장을 왕복 후 '엄마는 왜 운전을 못하는지?'를 내게 물어서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 돌아봐도 한없이 고맙고 고마운 석이엄마의 제의가 있었다. 덕분에 두 아이는 평일에 차로 30분 거리의 수영장에 주 1회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다행히 우리 집 앞으로 지나는 길이다.
큰 아이와 석이가속한 어린이팀은 25미터 길이 lane 중 110~120 센티 깊이를 유지하는 15미터 길이만 사용한다. 이후 10미터 길이는 갑자기 2.2미터가 넘는 깊이로 이어진다. 따라서 수영을 잘하는 중급반부터 전체 lane 사용이 가능하다. 아이들은 물에 대한 두려움 제거 목적으로 던져진 운동화 주워오기를 할 때 물속 들어가기를 연습하는 곳이다.
수영레슨 팀당 정원은 6명이고 30분 동안 진행된다. 작은 아이는 유아풀에서 첨벙거린 후 언니 오빠와 함께 동그란 미트파이에 케첩을 얹어 먹는 즐거움이 크다. 수영장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데는 그런 이유도 있을게다. 또 두 딸의 군것질이 귀하게 허용된 날이기도 하다.
늘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아이들을 한결같이 배려하던 예쁜 석이엄마는 이제 미국에서 사업 중이다. 그녀는 젊은 시절 내게는 어렵기만 하던, '고사리를 듬뿍 넣은 육개장' 맛을 보여주었었다. 십 년도 지난 어느 날 그녀는 휴일마다 직접 따서 말린 미국 어린 고사리를 꾹꾹 눌러 담아 한국의 내게 소포로 보내주었다.
운전면허시험이 몹시 두통거리였던 시절 나는 봉고를 씩씩하게 운전하며 콧노래를 부르는 그녀가 진심으로 부러웠다. 또 택시기사님들이 가장 존경스러웠다. 낯선 길을 암기해서 손님의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도착해야 하는 그 머리 아픈 기술을 직업으로 선택하다니.
시드니는 인구밀도가 낮다. 옛 마차길에서 시작되었다는 길들은 숲 사이로 이어지고 이 길을 따라 주택이 경사진 숲에 한적하게 드문드문 분포한다. 물론 번화한 시가지는 평지로 다듬어져서 주택도 평지에 위치한다. 내가 살던 Chatswood는 wood라는 지명과 다르게 평지에 주택들이 제법 서있다. 고개만 돌리면 가게가 즐비한 서울과 달리 시드니 주거지역의 <장 보기>는 대부분 숲처럼 여겨지는 산과 산 사이로 지나는 길을 차로 30여분은 달려가야 한다. 우유도 주스도 요즘에사 커진 용량의 서울 마트 상품처럼 크고 무거워서 애당초 도보로는 장보기가 불가하다. 따라서 호주의 생활은 차가 없으면 몹시 불편하다.
더구나 통근시간을 제외하면 버스 배차 간격이 1시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도 낮 시간엔 겨우 서너 명이 탑승해서 다니는 정도이다. 지하철역 가까이 있는 주택도 귀하디 귀하다.
만 3살 반의 어린아이가 십자가와 성모상을 앞에 두고 카펫에 앉아서 엄마의 운전레슨 2시간 동안 <나 홀로 집에>의 두려움을 기도로 극복하기를 바란 젊은 엄마는 참 어리석었다. 운전시험에 연거푸 떨어지는 동안 주 2회(화, 목) 레슨 중 중간에 목요일은 아이가 어린이집에 갈 수 있는 행운이 걸려들었다. 당시에는 어린아이를 <나 홀로 집에> 두게 되는 일이 아동학대임을 꿈에도 인지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늘 마음이 불안했었다. 특히 키가 큰 호주 사람들의 평균 신장을 고려하여 설치된 높은 키의 변기와 세면대로 인해 아이가 어려움을 겪을 수 있으므로,
연거푸 떨어지면서부터 도로주행시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인해 <중도 포기> 유혹이 점점 자라나는 게 더 두려웠다. 휴일에는 남편이 운전을 하고 있으니 아이들 수영레슨 문제가 아니라면 쇼핑센터가 즐비한 번화가에 면한 아파트에 거주 중인 주부가 구태여 운전면허증에 목을 맬 일은 아니다.
운전을 안 해도 되는 이유를 세어보니 다섯 가지도 넘었다. 적지 않은 레슨 비용, 남편의 불편 초래, 차를 양보받는 날마다 발생할 수 있는 나의 눈치보기와 스트레스, 알뜰살림을 역행하는 자동차 운행 비용, 운전자 보험 비용 추가, 초보운전자의 교통사고 위험 추가 등 운전을 안 해도 되는 이유는 열 손가락 가득 채워졌다.
운전을 해야 되는 이유는 운전을 안 해도 되는 이유보다 훠얼씬 적었다. 당시에는 운전면허가 없거나 자신의 차가 없는 한국 주부들도 많았다. 어린아이들을 키우며 성공한 교민 사업가 가정도 아닌 일시적 주재(temporary resident visa, 보통 3~5년 근무) 가정에서 직장생활 외벌이에 차를 2대씩이나 구입하긴 어려웠던 시절이다. 한국에서는 차가 1대도 없어도 동네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크고 작은 가게들이나 길거리 시장들이 있어서 불편 없이 살았는데... 넉넉하지 않은 상황의 주부들은 출근하는 남편 눈치를 보며 하루쯤 양보받아 쓰는 경우가 많았다.
도로주행경험이 없이 국제면허와 한국면허를 가진 상태에서 재시도한 <차들은 왼쪽길로>의 좌측통행국가에서의 운전면허시험... 시험관 2인이 동승한 운전면허시험을 패스하던 날은 푸른 하늘을 새삼스레 올려다보고 콧바람을 날리며 돌아왔다. 그동안 도움 준 운전레슨 코치의 축하를 받으며 감사를 전하고 돌아오는 길은 대단한 벼슬을 한 듯 마음이 날아올랐다. 누구보다도 먼저 작은 딸에게 전해야지.
현관문을 열자마자 십자가와 성모상 앞에 앉아있는 어린 딸이 눈에 들어왔다.
"서울아, 엄마 합격했어! 내 딸 덕분이야~**"
"이제 엄마 차 탈 수 있는 거예요?"
내게 안긴 어린아이의 볼에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렇게 힘들었던 일을 내색하지 않고 참아낸 아이나 그걸 그대로 곧이듣고 아이를 홀로 남겨두고 합격할 때까지 서른 번이나 운전레슨을 받고 다닌 엄마나...
<우리 엄마도 운전하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은 아이가 3살 반이던 시간에 시작하여 이웃들의 예언대로 나는 나이만큼 꼬박 30시간의 도로 연수를 마치고서야 드디어 자동차 운전면허를 땄다. 턱없이 기대했던 체력장 특급의 운동신경은 운전연수시간 단축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되었다. 시간과 비용을 평균만큼 투자 후에 간신히 손에 쥔 면허증이다.
이후 두 아이의 소원대로수영장 오가는 길에 자동차 뒷좌석에 태우고 비치타월을 덮어서 편안히 재울 수 있었다,또 흰 와이셔츠 차림의 팔을 운전석 차창에 기대는 모습이 멋져 보였던 남편 폼도 흉내 내며 운전면허를 가진 자의 여유를 만끽하면서 30여분 거리의 Willoughby 수영장을 오갔다. <주 1회 수영장 가기> 용도이지만 아내의 운전면허합격으로 인해 차를 한 번씩 내어주어야 했던 남편은 은근히 불편했을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손에 쥔 운전면허증 덕분에 훗날 중고차를 추가로 구입했다. 아이들의 악기레슨을 위해 먼 거리도 달릴 수 있었다. 또, 서울에서 오신 부모님을 모시고 1시간 거리의 외곽 한국인이 모여사는 곳의 한국병원도 거침없이 다녀올 수 있었다.
작은 아이가 중학생이 된 후 나는 스쿨버스 개념이 없는 외국에서 필수인 차량운전이 가능하여 Mac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곳은 서울과 달리 스쿨버스 개념이 없는 편이다. 에어컨도 없는 단돈 500달러짜리의 차를 사더라도 일단 오토로 달리는 기능만 있으면 될 만큼 거의 대부분의 성인은 차가 필요했다.
어느 날 아침 아이들 샌드위치 점심을 싸서 보내고 조금 여유시간을 이용해 부엌 인덕션 위에 마른 누룽지를 만들고 학교에 갔다. 오전 11시 번역 수업 중 프라이팬 아래의 인덕션 스위치를 끄지 않고 나왔다는 생각이 파고들어 전기누전으로 인한 <남의 집 화재 불안>이 뭉클거렸다. 운전을 나를 듯 가볍게 하던 시절이라 교수의 양해를 구하고 차로 씽씽 달려서 편도 1시간 걸리는 거리의 집을 다녀왔다. 아이들의 스트링 앙상블 연주를 위해 묵직한 바이올린 가방 2개와 이동식 보면대 2개를 공원까지 태워주는 서비스도 가능했다. 무엇보다도 언어습득과 낯선 사회 적응에 점점 고단해질 어린아이들 앞에서 '힘들어서 엄마부터 중도에 포기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엄마 운전연수로 인해 호주 기준의 <아동학대>에 해당하는 <나 홀로 집에>를 여러 차례 경험한 작은 딸은 이후 혼자 집에 남겨지는 것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보였다. 방이 하나 더 있는 아파트로 이사 후에도 자신의 침대는 비워둔 채 언니방에서 낮은 서랍형 이층침대를 쓰며 언니의 손을 잡고 자기를 선호했다. 6학년 때에도 작은 아이의 양보가 필요할 때는 <너 방 뺄래?>하면 즉시 양보가 이루어질 만큼. 그때까지도 어렸을 때 홀로 남겨진 시간의 후유증임을 인지하지 못한 엄마다. 성장과정에서 책 읽기와 운동, 악기연주를 좋아했던 작은 아이는 혼자 집 보는 것 빼고는 뭐든지 잘 해내곤 하였으므로.
크고 작은 일에 늘 엄마의 힘이 되어주던 작은 아이는 결혼 후에도 먼저 퇴근하면 빈집에 혼자 들어가지 못해서 집 앞 커피숍에서 컴퓨터 작업을 하며 남편을 기다리곤 했다. 그런 부분은 엄마인 나의 두려움 습관과 똑같다. 취학 전 어린 나이에 혼자 남겨진 경험을 기억하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어둠이나 혼자 남겨지는 데에 대한 공포가 크다. 그런 연유로 성인이 된 작은 아이의 <커피숍에서 기다리기> 마음을 공감한다.
어려서부터 아이의 빈집에 대한 두려움 해소에 시드니에서 입양한 요크셔테리어 반려견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두 아이의 유아 시절 시드니에서 어항 속의 금붕어로 시작한 반려동물과의 생활은 작은 아이가 5학년 말이 되었을 때 두 번째 시드니 생활이 시작되면서 시드니의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구입한 12주 차 새끼 요크셔테리어로 이어졌다. 눈 맞춤과 희로애락의 교감이 가능한 반려견은 두 아이의 정서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국내외 이사가 잦았던 우리 가족의 반려견으로 인한 동물매개심리치료 혜택은 1997년부터 시작된 셈이다. 온 가족에게 매일 행복을 선물해 주던 몸무게 3kg의 자그마한 반려견은 19살이 되던 해에 하늘로 갔다. 우리와 3개 국가를 함께 다니던 녀석과의 이별은 오랫동안 가족들이 미안함을 깨닫게 했다.
지난 시간들을 들여다보면 참 아슬했던 그리고 무지했던 부모노릇과 양가 부모님에 대한 어리석은 자식노릇이 발견되곤 한다. 너무 많이 지나와서 돌이키기는 불가능하지만 다행히 무사하게 지나서 그저 감사하다. 시대기준이 달라져서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부모나 교사의 '폭언'이나 '체벌' 일명 '사랑의 매'도 결국 아이를 권위와 힘과 서열로 설득 없이 누르며 고통을 주는 행위이니 <아동학대>로 간주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