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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llara Jul 24. 2023

공부는 학교 때 열심히

복 많이 받으세요

전날부터 정신을 쏙 빼놓게 만든 미안함으로 일단 프로그램 교정작업을 멈추고 옆지기와 큰딸과 저녁을 함께 했다. 멋지게 대접하고 싶은 마음과 달리 미지의 장소인 만큼 어설펐다. 가족들은 함께 둘러앉은 식당의 저녁에 행복해했다. 오늘 나를 구해준  내 우렁각시들에게 고맙고 미안하다. 숙소로 돌아와 프로그램들을 수정하고 교정작업을 하느라 마지막 이틀은 잠을 전혀 자지 못한 상태에서 녹화가 오후 5시에 마무리되었다.


대학교 3학년 때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판사로 퇴직한 친구 남편은 귀국을 머뭇거리는 내 작은 아이의 멘토가 되어주었었다. 당시 작은 아이는 2살 반부터 시작된 세 차례의 외국살이로  '우리나라'보다  객관적 표현인 '한국은~'에 익숙했었다. 


고등학교의 교장선생님께서는 법학전공 원서 제출을 강력히 추천했다. 반면에  우리 가족은 친구남편과의 저녁식사 이후 딸이 원하는 전공선택을 지원하기로 했다. 미련이 여전한 보호자는 그래도 법학과 의학 전공 원서를 추가로 만지작거리며 쓸데없는 비용을 지불했었다.


친구남편은 모녀의 늦공부 부작용을 단단히 겪는 중인 우리 가족에게 어느 날 S호텔의  딸기 생크림케이크 한 상자를 선물하여 기운을 북돋아주었다. 문득 폭풍웃음을 선사했다는 위트 있는 그이의 다정한 목소리가 떠오른다.


"공부는 학교 다닐 때 열심히 하시지. 그때는 놀고 뒤늦게 공부하느라 이게 뭔 일이래요? 남편도 쉬게 하고..."


이번 여정은 내 부주의로 진짜 <이게 뭔 일이래요?>이다. 비는 서울 출발 때부터 시작해서 일을 다 마치고 부산을 떠날 때까지 쉬지 않고 내린다. 부산 옆 도시인 양산의 일정을 마치고 서울로 출발하기 전에 옆지기와 모처럼 마음 편하게  속의 양산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다음날인 토요일 낮 12시에 S호텔에서 친구의 딸이자 제자의 결혼식이 있어서 늦은 밤에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 잠깐 잠든듯 하여 밤시간인 줄 착각했는데 어머, 이미 아침이었다.


몸살이 난 남편 대신 큰딸과 함께 결혼식에 다녀왔다. 티켓을 준비해 두었으니 차는 호텔 입구에서 발레파킹으로 맡기라는 혼주의 배려전화를 받고도 피곤함 탓에 직접운전은 불가했다. 냄새가 매스꺼움과 울렁거림으로 이어지는  큰 딸과 좁은 공간의 택시 타기는 주저된다. 결국 마을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했다.


다른 사람 배려가 몸에 밴  내 친구부부는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서먹하지 않게 자리배치하기가 제일 어려웠다고 했다. 부부가 활동폭도 큰데 소규모로 초대인원 조절을 어찌했을까?


친구가 미리 의논해 온 대로 40여 년 전에 여고에서 교사로 함께 근무했던 동료 부부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인사를 나누었다. 거짓말처럼 모습이  그대로인 그녀는 결혼 석, 박사 과정을 마치고 대학교수가 되었다고 했다.  그녀와 함께 두껍게 접힌 시간을 건너뛰어 초록잎처럼 순수했던  교사시절로 잠시 기억이 옮겨졌다. 테이블 맞은편에 10여 년 못 만났던 지인이 있어서 반가움 가득하여 서로 얼싸안고 등을 도닥였다. 옛 정겨운 지인들과의 만남만으로도 보람된 시간이었다.


S호텔 다이너스티 홀: 축제에 꽃의 역할이 컸다.


동료 부부와 헤어진 뒤 문득 숨어있던 피로가 쏟아져서 천천히 일어서는 내게 식탁을 치우는 호텔 직원이 권했다.


 " 단상에 빼서 쌓아둔 꽃다발을 골라가세요! 입구로 가져가시면 직원이 포장해 드려요."  


아, 꽃~. 


" 네, 고맙습니다."


오늘 식장에선 수국송이가 유난히 큼지막하다. 파란 수국을 좋아하는 작은아이를 생각하며 수국 송이들을 포장하여 품에 안았다. 신생아 얼굴만 한 송이꽃들의 무게에 내 몸은 더욱 물먹은 솜이 되었다. 집에 도착한 즉시 씻고 침대에 누울 생각만 가득한 채 지하철과 마을버스를 이용해 집에 오는 길이었다. 갑자기 경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수국이 정말 예쁘네요. 어쩌면 꽃송이가 그렇게 커요? 참 예쁘다."


마을버스 좌석에 앉아 그동안 쌓인 고단함에  옴짝도 힘겨운 판이지만,  못 들은 척할 수 없어 눈을 뜨고 연이어 이어지는 목소리를 향해 고갤 돌렸다.  


"꽃을 좋아하세요?"

", 수국이 참 예쁘네요."


결혼식 후 포장해 온 수국 2023 07.08

 마을버스 안에서 옆 칸에 앉은 그녀들은 내 품의 수국송이들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연신 감탄 중이다. 


"한 송이 나눠 드릴까요?"


수국을 한 송이씩 빼서 그녀들에게 선물했다.


"아이고, 꽃을 저희에게 주세요?"

"저희가 꽃이 많네요. 꽃을 좋아하시니 드릴게요."


속에서부터 단단하게 묶여서 포장된 꽃송이와 핸드백을 움켜쥔 채 포장지속의 철사를 더듬어 풀고  겉 포장의  리본을 풀어내고서야 키 큰 수국을 한 송이씩 빼낼 수 있었다. 꽃송이가 워낙 큰 탓에 두 송이를 빼내니 빈 공간도 커서 남은 꽃대들이 흔들거린다.


"어머머, 귀한 꽃을~

감사해요,

두 분 복 많이 받으세요!"

"아, 네. 복 많이 받으세요,."


예식장의 수국송이 덕분에 새해 설날의 덕담을 7월 한복판에 나와 큰 아이는  목소리가 청아한 그녀들과 교환 중이다.


그녀들은 나보다 먼저 정거장에서 내리며 인사를 또 하고 내렸다. 고단했던 우리는 그녀들의 꽃에 대한 관심표명과  덕담에 덩달아 행복해졌다.


이번 일주일은 업무의 고단함은 극에 달했지만 감사함이 가득하다. 혼자 살 수 없는 사회에서 알게 모르게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내 일상이 이어지고, 누군가에게 나도 모르게 도움을 전하는 동안 매일 새롭게 배우는 사회적 동물임을 실감한다. 작은 눈 맞춤과 사소한 몸짓에도 상호작용과 유대관계가 형성됨을 인간과 동물의 유대관계를 연구하며 새삼스레 배우는 중이다.


50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주소록 줄이기를 실천하던 일은 본의 아니게 멈추게 되었다. 딸아이 수술 후 찾아든 우울로 인해 감정기복이 커지며 참여한 웃음치료센터에서 만난 이들과 나눠갖게 된 전화번호를 시작으로 동화구연과 미술치료등 프로그램마다 고마운 이들이 생기면서 지금은 반대 반향으로 가는 중이다.


 '나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라는 <악동 뮤지션>의 노래가사처럼 내심 당황스럽다. 아침이면 카톡창들의 굿모닝 인사와 하루 덕담들이 도착한 덕분에 응답을 하며 덩달아 선물인 새 날을 시작한다. 생의 여정은 내 계획대로 될 생각이 없나 보다.


꽃다발을 품은 채 현관문을 여니 말티스 '수리'가 현관문을 향해 서서 꼬리를 돌리고 있다. 우린 자세를 낮춰 키 작은 수리와 눈 맞춤을 하였다. 사범대 시절엔 정작 추가공부는 꿈도 꾸지 않다가 내리막 길에 시작한 동물응용과학  공부 덕분에 유기견 수리를 만나고,  7월에 <복 많이 받으세요> 덕담을 듣는.  지난 늦공부 덕분에 지금 마음은 가장 평화롭고, 머리와 몸은 좀 바쁘다.


여러분들도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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