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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llara Nov 21. 2023

방을 옮길까요?

명칭은 호텔

옮길까요?


낯선 곳 방문을 준비할 때는  항상 하루를 마무리하는 잠자리부터 먼저 배려하게 된다. 쾌적한 수면은 업무효율성을 높여주므로.


올해 초여름 양산에서 경험한 숙소는 그렇잖아도 합리적이지 않게 많은 업무로 인해 수면이 부족한 내게 불편을 얹어주었다.


요즘 같은 초고속 후일담을 올리는 유튜버와 각종 카페의 <이런 일도~>의 전성시대에 불량한 상태의 방에 투숙객을 받는 호텔의 배짱이 대단하다. 투숙 후 예상치 못했던 일들로 방을 옮기게 된 상황도 당황스러웠지만, 갈수록 가관인 룸 상태는 처음 겪는 일이다.  의도적인 건 아닐 텐데...


*7월 방문때 방의 한쪽 벽 모습

군대를 다녀와서인지 예상치 못한 불편에 무던한 모습을 보이는 옆지기 앞에서 지적질 아내는 까탈스러운 사람처럼 여겨진다. 두배로 속상한 상황이다. 이런 방이 여러 곳을 검색해서 찾은 숙소라니 쯧...


그이샤워기 물이 흘러서 세면대 앞에 도달하는  이 욕실을 자동차 닦는 수건으로 열심히 닦아냈다.  그렇게 정신없는 아내가 욕실에서  미끄러지는 불상사는 막아보고자 애썼다.  평이 좋은 40여분 거리의 숙소를 추천한 옆지기에게 학교와 가까운 거리의 숙소를 추천한 건 '나'인데, 고생은 그이가 도맡고 있는 중이다.


*7월 방문 때 샤워실 한 벽면

"옮길까요? 당신이 찜했던 그 좋은 호텔로? 조금 멀긴 해도..."

"이번에는 수리가 되어 있겠지. 난 지난번 그곳도 학교랑 가깝고 위치가 좋아서 괜찮은데... "


뜻밖이다. 지난여름에 필요한 여행가방 세트를 서울에 둔 채 내려온 첫날,  잔뜩 예민한 파트너의 심기를 맞춰주느라 수고했던 기억이 희미해진 건가? 촬영복장이나 화장품 문제는 롯데마트의 미샤 화장품 관계자와 서울의 큰딸 덕분에 꿈처럼 해결되었지만('7월의 산타', '기억하세요?' 제목의 글 에 사연이 있습니다.), 마지막 수업준비가 미진해서 서울에서부터 계속 수면이 심하게 부족했던 이유가 더 컸다.


그리고 여름 이틀 동안 마무리 검토 작업을 마치고서야 양산의 파란 하늘, 바람,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 여름에는 떠나기 전날에야 비로소 차분한 아침을 9층 식당에서 즐겼다.


 아침에 라면을 먹는 수요가 있나 보다. 덕분에 처음 먹어본 아침의 컵라면은 별미였다. 밀가루 제품에는 소화불량이 생기곤 하는데도  밥솥에 담겨있던 흰쌀밥을 한 수저 넣어 라면 국물과 함께 마무리했다. 다른 여행객들도 아침 식사로 컵라면을 즐기는 중이다. 히말라야 산행에도 컵라면이 필수품이라더니 아침 컵라면 경험을 하고 보니 공감이 된다. 평소라면 가볍게 과일과 야채, 우유나 따끈한 물누룽지 중 골라서 브런치처럼 먹을 텐데, 이 호텔에선 뜻밖에 컵라면 특식을 아침식사로. 


가을에 지방 숙박은  어떡하나 ? 숙식예약을 미루며 고민 끝에 일단 그 호텔에 전화를 걸어보기로 했다. 모텔은 경험한 적이 없으니 비교가 어렵긴 하지만, 호텔이라는 이름은 좀 과장이다. 아, 스위스를 포함한 서부 유럽 여행 중 알프스로 향하기 위해 묵었던  행선지에서 Bathroom 속의 독립 샤워실이 유난히 좁고 아담했던 곳에도 호텔이라는 이름이 붙어있긴 했다. 깔끔했지만 좀 특이하게 좁고 오래되고 낡아서 인상적이었는데...


이젠 깔끔해요


전화를 받은 사람은 지난번 수고를 했던 여사장인 듯하다.

"직접 수리를 해서 이젠 깔끔해요. 좋은 방으로 드릴게요"


자신 있게 대답하는 그녀 덕분에 학교와의 거리가 가깝고 번화한 곳이어서 그이의 점심과 우리의 저녁식사를 선택하기가 수월한 이곳으로 마음이 기운다. 젊은 시절과 달리 난 아주 보수적이 되어 뭔가를 바꾸는 일에 유독 느리게 변해있는 탓이다.


우린 '호텔'이라는 이름의 숙소가 갖춰야 할 당연한 조건에 대해서 장거리 전화로  대화중이다. 그녀의 말을 듣고 다시 그 숙소로 정했다. 밤에 편안한 잠을 잘 수 있는 휴식이 필요한 투숙객이므로 샤워가 가능하고, 쾌적한 침대와 이불이 있고,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책상과 의자가 있으면 된다.


*10월 마지막 주인 가을에 도착한 호텔 룸에 비치된 욕조가 있는 객실


그렇게 잠시 갈등 끝에 늦가을에 도착한 숙소의 룸은 그녀의 배려 덕분인지 흰색 욕조까지 설치된 욕실이 있는 깔끔한 공간이었다. 아, 다행이다, 일단 정상적인 룸이어서. 그이도 나도 샤워기만 사용하겠지만, 정갈한 욕실과 침실, 그리고 쾌적한 이불과 베개 덕분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숙소에서 사용한 스타일러(사진 출처:  11번가)


더구나 방에 설치된 '스타일러'는 지난번에도 있었는데 그때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그냥 옷을 걸어두기만 했다. 이번엔 정장이 여러 벌이어서 하루 착용 후 스타일러에 넣어 냄새를 제거할 수 있겠다.


정장 재킷은 최근 10여 년 동안 옷장 한쪽에 얌전히 걸려있을 만큼 요즘 차림은 편리함 위주라서 입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학교 측의 복장 관련 제안에 따라 착용하고 바람만 쐬어 들여놓기에는 좀 찝찝하던 차인데, 스타일러 덕분에 소독할 수 있나 보다.


1시간여의 스타일러 작업 끝에 드라이한 듯 뽀송뽀송해진 모직 재킷을 꺼내며 행복해졌다. 높은 온도의 스팀 탓인지 한쪽 칼라가 살짝 들려있어 도닥여주니 정상이 된다.  이렇게 편리한 기술을 개발해 내는 기술 연구팀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저절로 든다.


두 번째 작업이라 업무도 순탄했고 미리 준비를 충분히 해두어서 자료준비도 쾌적한 상태이다. 더구나 숙소도 깔끔하니 이번 일정은 순탄할 듯한 예감이다.


호텔 1층 입구에는 투명한 창의 온장고에 따뜻한 꿀물이 담긴 음료병들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커피머신에서 자유롭게 커피를 뽑아마실 수도 있다. 작은 배려에 심쿵했다. 첫날 저녁엔 일을 마치고 귀갓길에 따스한 꿀물이 담긴 음료수병을 2개 꺼내서 룸으로 올라갔다.


 9층에 마련된 아침 식사 코너에는 라면과 식빵, 버터, 쨈, 커피머신, 우유, 오렌지주스가 있다.  가벼운 아침을 준비한 호텔 운영진의 배려도 새삼스레 돋보였다. 숙소 가격도 저렴한 편인데... 이번에도 아침에 토스트와 라면을 번갈아 먹어볼까? 다시 오기를 잘했다.


세면대 위의 스크래퍼


*가을 방문 시기에 세면대 옆에 있던 스크래퍼


문득 욕실 한쪽에 놓여있던 스크래퍼가 낯이 익다. 우리 집 욕실 유리벽의 물기를 제거하고자 얼마 전에 내가 구입했던 것과 닮은...


'여기 호텔은 손님들이 필요하다고 스크래퍼를 요청하나?'

' 아님 투숙객이 스스로 욕실에서 넘치는 물을 제거할 때 필요한가?'

'청소하는 분이 깜박 잊고 놓아둔?'


 잠깐 생각이 분분했으니 그런 일에 생각을 쓸 여유는 없다. 그냥 '그런가 보다'로 스치기로.


마지막 날에 그이에게 물었다.


"혹시 욕실 스크래퍼.... 집에서 가져왔어요?"

"응'

' 헐, 진짜네. '

'안 고쳐졌으면 이걸로 물기를 먼저 제거하려고, 지난번에 자동차 수건으로 닦고 매번 짜는데 팔목이 아팠어. "


"아니 그렇다고 섬마을도 아니고 도시의 호텔에 묵는데..."

"사실 이렇게 깨끗하게 고쳐지리라고 기대를 안 했거든. 자기가 혹시 미끄러질까 봐서 미리 준비했지. "

"뭐 이런 사람이 있지? 나만 미안하게"

"지금도 욕조 샤워기를 사용하면 물이 세면대 앞으로 모여들잖아. 최소한의 비용으로 고치느라  그런가... 가져오길 잘했더라고. 매번 욕실 물을 저걸로 닦아내고 자동차 수건으로 마무리하면 안심."

이 남자는 내 앞에서  '배려'홈런을 날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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