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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슬기로운 의사생활

난 네게 반했어

by 윤혜경
img.jpg *큰누나를 위한 아빠의 초여름 선물 '라일락'과 '하얀 철쭉'



한나절의 시간을 만들어 대학병원에 큰누나 아빠가 운전하는 승용차로 가는 날이면 나, '수리'는 운전자 옆좌석에 앉은 누나의 무릎 위에 앉는다. 차가 흔들리면 큰누나는 속이 매스꺼워지므로 아빠는 안전속도를 철저히 준수한다. 뒷 좌석의 누나 엄마가 매의 눈으로 계기판을 보고 있을 것이고...


큰누나가 대학병원에 가는 날이면 나, '수리'는 누나의 무릎에 앉아 고개를 세우고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도 볼 수 있고, 큰누나가 나를 안아 세워주면 조금 내려진 창문 틈 사이로 스치는 바람에 귀밑머리를 날린다. 그리고 누나가 나를 위해 잠시, 아주 잠시 동안 3분의 1쯤 내려주는 유리창 틈으로 백미러에 비친 내 얼굴을 들여다볼 수도 있다. 나, 수리는 큰누나의 무릎 위에 가만히 선채로 내 얼굴을 스치는 바람을 언뜻언뜻 느껴볼 수 있는 자동차 드라이브가 차암 좋다.


오늘 엄마는 큰누나와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안방 침대에 누워 편안하게 시청하며 '너는 내게 반했어' 밴드 연주를 듣고 아주 행복해했다. 큰누나도 엄마도 그 드라마 속의 주인공들의 연기를 아주 좋아한다.


수술 솜씨는 내로라하는, 그러나 '음 조절이 대략 난감한 의사 '송화'를 위한 동료 의사 네 명의 배려하는 표정들에 엄마랑 큰누나는 감격 그 자체이다. 매번 엄마를 긴장하게 만들며 누나를 치료 중인 무표정한 의사들과 대조되는 드라마 속 의사들에게서 치유받는 중인지도...


"저 친구들 너무 멋지지 않니?"


잠시 세상살이를 유추해보고, 드라마에 그려진 그네들의 짭조름한 노력이 아마도 실생활에선 귀한 모습이라서인가? 드라마가 끝났는데도 서재로 옮겨서 컴퓨터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한참 동안을 [슬기로운 의사 생활] 드라마 장면들에 대한 되새김을 하는 데에 두 사람은 시간을 아낌없이 할애했다. 맨날 '시간 낭비하지 않게'를 입에 달고 사는 누나 엄마는 이번엔 유튜브를 켜서 슬기로운 의사생활 주인공들이 부르는 [넌 내게 반했어]를 1시간 반복 repeat! 중이다. 엄마가 한밤중에 1시간씩이나 노래를 켜놓은 채 서류 검토를 하다니... 원래 엄마는 글을 읽을 때는 클래식도 꺼둔다,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나, 수리는 큰누나네에게 입양 직후, 어느 날 대학병원에 긴 검사와 치료를 위해 아빠랑 엄마랑 큰누나가 승용차로 새벽에 가서 오후에 돌아오던 날 수리의 분리불안 모습을 들킨 이후에는 큰누나가 어디를 가건 밤낮에 상관없이 동행하게 되었다. 나, 수리가 보채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분리불안증' 치유를 위한 합법적인 동행이다.


엄마의 서재에는 나, 수리를 위해 얼마 전부터 나의 폭신한 침대 위에 모시 패드가 놓여있다. 여름 끝자락이지만 덕분에 제법 시원하게 지낼 수 있다. 7년 전부터 많이 아파서 늘 누워있던 큰누나의 침대에 여름이면 놓인, 꽃 자수가 발치에 그려진 예쁜 모시 패드인데 큰누나의 두 발이 닿는 자리만 동전 크기로 헤어졌다. 많이 누워있어야 했다는 뜻이다. 엄마는 큰누나에게 조금이라도 헤어진 패드는 '농농(No! No!)'이라며 걷어냈다. 누나의 물건은 모두 건강해야 하므로!



KakaoTalk_20211012_205014490.jpg *일단 잘라서 내 침대 위에 얹어둔 모시 패드



그리고 아빠가 주민센터에서 구입해온 폐기물 영수증을 붙여 비닐에 담아 엄마가 들고나갔다. 잠시 후 돌아온 엄마 손에 패드가 그대로 있었다. 버려질뻔한 패드가 아래층에서 문득 반짝인 엄마의 아이디어 덕분에 돌아온 거다. 엄마는 대부분이 성한 커다란 패드를 큼지막하게 오려서 나, 수리를 위한 여름 침대를 만들어주었다. 말티스 '수리'는 그동안 애용했던 양털 침대보다 엄마가 만들어준 시원한 모시 패드가 열 배는 더 더 좋다.



오늘은 나, 수리의 역할을 맡아서 큰누나에게 웃음소리를 선물한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고마움이 가득한 목요일이고, 이 드라마 때문에 나는 자정이 지난 시간에도 엄마의 작품인 서재의 모시 침대 위에 지금도 엎드려 있다. 두 사람이 중간에 TV를 시청하였으므로, 오늘은 컴퓨터 작업이 끝나고 안방으로 잠자러 가는 시간을 평상시보다 더 오래 기다리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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