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읽어주신 작가님들께 송구합니다. 올린 글이 많이 길어서 4화로 나눕니다.
어찌 '사랑과 평화'만 있겠는가
내 아버지와 같은 연세의 1931년생 친정어머니가 거동을 못하시고 누워계셔서 오빠들과 번갈아 대소변을 받아낸다는 친구가 떠올랐다.
구순 연세에 등의 통증이 괴로워 척추시술을 하신 뒤 아예 누우신 친구네도 남편을 여읜 고명딸이 친정엄마네로 들어가서 부모님의 노후 병원일정을 오래 동행해 온 경우이다. 이제 친구네는 친정엄마만 계신다.
경제적 여유는 많지만, 요양원을 두려워하시는 엄마를 살가운 아들과 딸이 당번을 정해 번갈아 대소변을 치우며 정성껏 돌보는 중이다.
호텔에 도착을 예고했던 시간이 지나고 있다. 우선 호텔에 다시 예정 체크인 시간을 알렸다. 그리고 예정보다 늦은 시간까지 부모님과 함께 있다가 아쉬워하시는 부모님을 뒤로하고, 동생과 함께 우리가 묵을 호텔로 가기 위해 나왔다.
이제 보니 두 분 모두 그 긴 시간을 침대에 눕지 않고 계속 식탁의자에 앉아서 우리 얼굴을 들여다보며 온 힘을 다해 버티고 계셨었다.
거동이 더 불편하신 아버지와는 허그 Hug를 끝으로 현관에서 헤어졌다. 만류도 소용없이 엄마는 불편한 몸을 기우뚱거리며 바람처럼 빠르게 신발 착용에 성공했다.
그리고 보조보행기를 1층까지 밀고 따라 나오셨다. 어두운 입구에서 떠나는 우릴 향해 한없이 손을 흔들고 서 계신다. 혼자 올라가셔야 하는데...
밤 9시 즈음 호텔 도착 후 늦은 시간이라 적당한 찻집도 없다. 커피 한 잔도 없이 여동생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3 조카의 진학 관련과 부모와 합가 후 여동생의 일상, 그리고 애로사항을 들었다.
"입맛이 없어서 점심을 거르신다고...
오늘은 점심을 맛있게 드셨어.
사실 나도 60이 넘으니 에너지소모가 적어서 하루 2식이야.
가끔 군것질하고"
"언니, 부모님은 늘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데, 대신 군것질을 하시는 편이에요.
제가 미리 사두죠.
엄마도 아버지가 드시고 싶은 거 주문하시고"
"움직임이 적으시니 입맛 없으신 거는 당연하지.
네가 마음고생이 많구나.
역할을 나누지 못하니 미안하다."
"아니에요.
자꾸 입맛이 없다고 말씀하셔서 동생들도 걱정되어 전화하고..."
같이 생활하는 사람 입장은 미처 헤아림 없이 부모님께 귀를 기울인 형제들이 부모님과 함께 사는 여동생에게 스트레스를 줄 수도 있음을 깜박했다.
아래 여동생들은 둘째와 나이 차이가 거의 없다. 친구처럼 쿵작이 아주 잘 맞으니 서로 도와서 다행이다.
내 양가 어머님이 큰 자식으로 시부모님과 오래 생활하시며 먼 데 있는 형제들의 인사치레 간섭으로 맘고생을 하시는 걸 보았었다. 익히 알고 있던 사항인데... 아차 싶었다.
"예전 호주에서 귀국하고 들르신 언니가 내게 한 말이 맞나 봐요."
"???"
"내 손바닥을 들여다보고 언니가
'손바닥 잔금이 많으면 고생한다는데'
했던..."
"아, 나는 내 손바닥에 잔금이 많아서 내 위치가 큰딸에 큰며느리인가 싶었어.
'너희 부부가 성공한 사업자금을 잠깐 빌리자'던 제부의 친구가 잠적하고 네가족이 엄마집으로 들어왔잖아.
피아노를 오래 친 네 손가락이 길고 가냘파서 늘 예뻤어. 만져주다가 잔금들을 보고 쉰 소리 했나 보다"
"가끔 생각나요. 그래서 난 순탄하지 않은가 하고."
"지금 너희 부부가 제일 안정적이잖아,
얘들도 잘 크고,
제부도 긴 정년의 기관장이고, 강의도 하시고.
너도 네 사업을 운영하니 나는 멋진 네가 부러운데?"
여동생과의 합가로 부모의 안전에 대한 걱정에서 한숨은 돌렸다. 일관성이 아쉬운 큰아들과 며느리 대신 부모님 돌봄을 자청한 여동생에게 부모님의 남은 재산 증여에도 불구하고 새삼 미안하다.
한편으로는 평생을 자식을 뒷바라지하시고 당신들은 절약하시고 자식들에게 경제적 지원까지 아끼지 않으셨던 부모님이지만 노쇄해지는 건강 앞에서 자신들의 의지와 반대로 자존감이 갈수록 낮아지는 부모님을 뵈며 서글퍼졌다.
누구나 가는 길이라 할지라도 유난히 헌신을 마다하지 않으신 부모님의 노후를 보며 나를 대입하고 있나 보다.
여동생이 떠난 후, 큰딸이 흰 봉투를 내게 내밀었다. 외할아버지와 큰 이모가 주신 선물이라고. 결국 내가 준비한 용돈들보다 더 돌아오고 말아 착잡하다. 친정 큰딸의 위상이 이제 그 지경이 되었나 보다.
살포시 내일 만남을 기대하시는 부모님께
"내일 다시 들를게요"
라고 말씀 드리지 못했다. 상황을 보는 게 나을듯하여.
심지어 서울로 출발하는 시간도 정확히 말씀드리지 못하고, 오전에 노트북으로 컴퓨터 작업을 좀 하고 점심때쯤 공항이동 예정이라고만 말씀드렸다.
여동생남편의 거주지를 직장 앞에 따로 마련해 준 속 깊은 여동생이 노환으로 고생하시는 부모님과 함께 하는 생활에서 덜 힘들기를.
3대의 한 공간 거주에 어찌 '사랑과 평화'만 있겠는가마는 당시 서로의 윈윈을 위한 최선의 시도였으므로.
잠깐 다녀가는 나와 달리 매일 부모의 안전을 맡고 있는 여동생 덕분에 다른 형제들은 자신들의 일상을 평화로이 유지 중이다.
어려울 때 부모의 지원을 가장 많이 받은 여동생이지만, 그건 형제들의 시각이다. 정작 본인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 주변에서도 아들며느리보다는 부모와 공감대가 진한 딸의 부모 보살핌이 실감 나게 커지는 시대이다.
"내가 시간을 조절해서 4주쯤 모시고 식사를 챙겨드리게 날을 잡아볼게. 장거리 이동을 견디실 수만 있다면."
"언니,
다른 곳으로 옮기시려면 필요한 보조기들과 짐이 너무 많아서 이동이 어려워요.
서울까지 휠체어로 이동하시기가..."
"비행기도 KTX도 휠체어 이동이 가능하니까."
"그 다음 집까지 택시로 가셔야 하는데...
승용차는 너무 오래 걸리고...
아버지는 허리가 아파서 견디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15년 전까지는
"웬 손님이 그렇게 많으세요?"
"오늘도 손님이 계시네요."
예전 아파트 경비아저씨와 집으로 방문하는 국어과외 선생님이 내게 이렇게 말했었다.
정년 직후 보통 4주씩 계시면서 휴가를 즐기셨다. 물론 서해안과 동해안의 전망이 좋은 콘도에서 우리들과 여름, 겨울 휴가를 다니시며.
그리고 동생들은 부모님을 뵈러 우리 집으로 왔다. 잦은 해외살이 후 그리움을 녹이는 과정이었을까? 딸이 많은 집이라 출가 후에도 온갖 이유로 늘 뭉쳐서 바글바글했다. 내 두 딸들에게는 산만한 환경이 되었을지도.
내 아이들이 대학생이 된 뒤에는 여동생들의 호흡기 질환이 심했던 어린아이들 병치레에 필요한 손을 보태시느라 동생들 집에서 머무셨다. 그리고 자식들의 어려움에 도움을 주시곤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인 외손주들의 귀여움도 보실겸.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다"듯이 부모님의 늦가지인 세 딸들에게 퇴직하신 부모님의 손보탬은 요긴했다. 새로운 곳에서 뿌리내리며 딸들은 육아와 아이들의 학교생활에 대해 늘 부모의 지혜와 조언을 구했었다.
그 늦가지 세 딸이 부모님 노후의 기둥이다. 자상한 사위들, 그리고 섬세한 심성의 딸들과 배려심 깊은 부모의 다정한 교감 덕분에 가능한 시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