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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llara Jun 24. 2024

하늘색 양산,  난 네가 참 보고 싶다

목요일 오후의 긴 이별


*양산들(출처: 갤러리아)


요즘 작은 딸네 집에서 주 2회 큰딸과 함께 오후 4.30~밤 9:00까지 머문다. 가는 길에 유치원과 초등학교들을 지나게 되는데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손주들의 등원을 위해 교문 앞에서 기다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최근 나도 그들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손주를 오래 돌봐온 분이 기존 질병 치료 중이어서 일단 연말까지 양쪽 할머니가 급하게 돌봄 가능한 시간을 만들기로 했다.  외할머니인 나는 목요일과 금요일 이틀에 걸쳐 만 4세 아이의 유치원 오후 픽업부터 잠들기까지의 아이 돌보미가 되었다. 덕분에 주말에도 컴퓨터 앞을 떠나지 못해 조금 분주해졌다.


작은 딸 집 정기방문 덕분에 주 2회 확실한 걷기 운동이 되고, 아이가 주는 한아름 기쁨에 엔도르핀이 뿜뿜이다.  매일 스펀지처럼 흡수하며 세상을 배우는 어린아이를 제대로 돌봄하고 있는지 자신이 없어 만 4세 아동의 언행 관련 정보 읽기도 필수이다,


정년퇴직 후 한숨 돌린 안사돈이 사흘을 맡아주신 덕분에 친정맘의 부담이 좀 가벼워진 셈이다. 안사돈은 아이 출생 후부터 토요일에 아이부모의  개인일이나 휴식을 위해 손주 돌봄을 해주셨다.


섭씨 35도를 넘나 든다는 예보에 시린 눈을 위한 선글라스와 양산도 필요하다. 양산이 본의 아니게 여럿이지만 그중 작은 딸이 해외출장길에 선물해 준 하늘색 순면 접이양산은 가볍고 나무로 된 손잡이 촉감이 좋다. 양산을 넣는 천으로 된  커버는 가벼운 미니 장바구니처럼 반으로 접히는 디자인이어서  마음에 쏙 든다.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햇살도 비도 함께 피하라고 구입해 준 딸의 마음도 고맙다.


맑은 하늘색을 꼭 닮은 이 양산은 디자인이 깔끔해서 나도 모르게 아끼고 있었다.  이 나이에 양산을 아껴서 어쩌자고 쯧. 선물 받은 지 2년째 사용하지 않았다.


"엄마, 양산 쓰세요? 어때요? "

"그럼. 내 딸의 눈썰미로 고른 거니 맘에 쏙 들지."


사실은 천 케이스에 담긴 채로  옷장 선반에 놓아두고 옷장문을 열 때마다 꺼내서 손잡이의 부드러운 우드감촉을 만지고 가벼운 무게를 느끼며 작은 딸이 함께 생각나는 양산과 눈 맞춤만 하곤  넣어두었다.  예전과 달리 큰애가 아프면서 가족여행을 거의 멈춘 것도 이유일게다. 지금껏 양산 사진 한 장 찍어주지 못했다.


지난 목요일(6/20)에 유치원 앞 놀이터의 쨍한 햇살을 막으려 양산을 골랐다. 순면 펀칭 살색 양산은 시원하지만 조금 무게감이 느껴지고,  분홍색 양산과 푸른 꽃무늬 양우산은 아주 가볍고 크기도 앙징맞다.  뭘 선택할까 잠시 고민했다. 문득 청명하고 쨍한 하늘빛과 똑 닮은 맑은 하늘색 양산을 가져가고 싶었다.  


요즘 무더위라 옆지기가 지하철 역까지 바래다준다. 그날도 그이 덕분에 차로 지하철 역에 도착했다. 아이의 반찬을 준비하여 담은 흰 보냉가방과 하늘빛 양산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큰 아이는 아이와 놀 때 입을 편한 바지와 보냉물병, 티슈 등이 들어있는 자신의 작은 배낭 외에 도서관에서 빌려온, 아이를 위한 그림동화책 몇 권을 담은 에코백을 들고 있다. 나는  내 물병이 한쪽 포킷에 든 작은 배낭을 메고 오른손에 흰 보냉백을 든 채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 서서 2개의 양산주머니 고리를 왼손가락 2개에 걸고 내려가 지하철을 탔다.


작은 딸 집에 도착하자마자 욕실에서 손부터 닦고 냉장고에 아이음식을 보관했다. 그리고 놀이터에서 당황하지 않도록 미리 화장실도 이용했다. 다시 손을 닦고 얼굴도 찬물로 닦은 뒤 10분쯤 쉬었다가 유치원 픽업 시간에 맞춰 내려왔다. 햇살이 따가웠다.


"아, 양산을 식탁 위에 놓고 왔나 봐. 잠깐만..."

"엄마, 내가 빨리 갔다 올게요."

"아냐, 내가 두었으니..."


큰딸에게 양해를 구하고 급히 11층까지 올라가 집 현관문 번호키를 눌렀다. 급한 마음에 손가락도 덤벙거려 2번이나 실패 끝에 3번째에야 성공하여 문을 열었다. 식탁 위를 둘러보았다.

'없다...???'

부엌에도 거실에도 아이 종이집 위에도 없다.

'어디에 두었더라?'


금세 아이 픽업시간인 4시 30분을 겨우 5분 남겨둔 시간이 된다. 도보로 10분 거리이니 마음은 급한데 기대했던 양산이 얼른 눈에 띄지 않아 마음이 다소 불편했다. 일단 아이 하원시간에 늦지 않는 게 더 중요하므로 모자를 쓴 채 큰딸과 유치원으로 갔다.


놀이터에서 아이가 또래들과 1시간여를 놀게 하면서 내 마음은 온통 하늘색 양산 생각으로 가득했다. 마치 집에 보물딱지를 놓아두고 나온 어린아이처럼.


'양산은 작은 딸 집에 있겠지?'


지난봄엔 버스에 앉은 채 좌석 한쪽에 친구가 선물했던 모자를 놓고 내렸다. 내리자마자 기억나서 버스뒤편 번호판을 사진 찍고 하차시간을 기록해 두었다가 버스회사에 문의 전화를 했다. 사흘간 해보라기에 시도했으나 분실물 연락처를 이리저리 넘기는 불친절한 안내에 포기했다.  

'잃어야 또 구입하게 되고 그렇게 경제는 순환되는 게 정상이야'

스스로 도닥거렸다.


보통은 하원 후 또래들과 맘껏 놀이터에서 놀게 한 뒤 오후 6시에 아이랑 집으로 향하지만 오늘은 편치 않은 마음을 다스리고자 30분 이른 5시 30분에 아이를 설득해서 아이집으로 향했다. 집안에 들어서서 놀이터에서 흙장난을 한 아이 손부터 비누로 잘 닦게 했다. 그리고 내가 무의식적으로 양산을 놓았음직한 장소를 살펴보았으나 어디에도 양산은 없다.


'옆지기 차에 놓아둔 채 내렸나? 제발 그랬길... 뒷좌석 밑에 떨어져 있을지도...'

지하철 하행 에스컬레이터에서 양산 케이스의 손잡이를 제대로 잡아 손가락에 걸었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선명하지만 혹시 모르겠다. 물건을 이렇게 흘리고 다니는 기억력이니.


옆지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뒷좌석에 하늘색 양산이 놓여있나 확인 부탁해요."

확인 후 알려주기로 했는데 답이 없다.

내가 전화를 했다.

그이가 전화를 받았다

"어, '없다'라고 메시지 보냈는데... 뭘 자꾸 잃어버리고 다녀?"


그제사 확인했다.

카톡이 아니고 메시지로  

"없네요."

이다.

안 그래도 속상한데 말도 안 예쁘게 하는 남자... 목소리는 좋은데 꼭 이런 땐 도움은커녕 염장을 지르는 눈치 없는 인사다. 그래서 자주자주 남의 편이다. 자기는 집에서도 종일 핸드폰을 찾으면서... 그 남자의 핸드폰 찾기에 자주 동원이 되곤 하는 딸과 나는 집전화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 그의 핸드폰이 소리 내는 장소를 찾아낸다.


놀이터에서 큰애는 금세 핸드폰으로 분실물 센터를 확인해 보고 7호선 분실물 모음장소까지 확인한다. 10년의 투병기간 동안 조금씩 차도를 보이면서 언젠가부터 큰아이는 내 몸 반쪽처럼 든든하다. 내가 2015년 4월부터 아픈 딸의 붙박이 보호자였는데 어느 틈에 큰아이가 조용조용히 내 보호자가 되어가고 있다.


큰 아이는 여전히 일상생활의 불편을 겪고 전해질 불균형 징조가 보이면 동네병원에서 혈액검사로 확인해야 한다. 다시 상황에 따라 대학병원에서 약을 조절해야 하지만, 수술 후 5년 동안의 고약했던 시간에 비하면 젊은 아이답게 조금씩 건강이 좋아지는 중이다. 극도의 칼슘조절 장애로 인한  의식소실이 사라졌으니 정말 다행이다. 조금 몸에서 작용하고 흡수되지 못한 약성분은 지난 십 년 동안 소변을 따라 배설되는 것 외에 척추뼈 근처에 쌓이는 모습이 확인되니 두렵다. 그래도 이제 하루 15알 약복용으로 버틸 수 있어 다행이다.


그동안 나는 50대 중반에서 60대 중반이 되고 조용조용히 빠르게 체력이 떨어지며 늙어가는 중이다. 건망증은 일상으로 나타난다. 잊음이 많아 물건 분실을 몇 차례 겪고 난 후부터는 지하철 자리에 앉더라도 배낭도 손가방도 절대로 풀어놓지 않는데... 양산이 담긴 양산케이스 고리를 무의식적으로 손목에서 풀어 옆에 두었나.... 또 실수했나 보다.


목요일엔 늦은 밤 귀가라 전화로 지하철 유실물 센터에 묻기도 불가하다. 인터넷 검색을 하니 유실물 찾기와 경험담이 많이 올라와 있다. 그렇다면 나도 희망을 품어보는 걸로.


다음날 아침 금요일 오전 9시가 넘고 직원이 출근 후 당일 회의를 하고 조금 여유가 생겼을 9시 30분이 되기를 기다려서 태릉지하철역 분실물센터로 전화를 했다.

"20일 오후 4시 10분쯤 No.5-4 지하철 칸에 하늘색 파라솔을 놓고 반포역에서 내렸습니다. 혹시 습득물이 있을까요?"

"파라솔이요? 양산 아니고요?"

"아... 양산인가 봐요."

".... 없는데요."


나는 '파라솔'과 '양산'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가 직원의 물음을 듣고서야 '양산'으로 고쳐 말했다.

요즘 '파라솔'은 '비치파라솔'을 의미하나 보다.


"내일 다시 확인 전화드려도 될까요?"

"내일은 토요일이라 저희도 휴무입니다. 월요일에 전화하세요."

"네, 고맙습니다.


혹시 싶어서 7호선의 종착역과 반포역에도 전화를 해보았다. 결과는 역시 실망이다.

이번 주말은 하늘색 파라솔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시간이 되나 보다.

일요일에 지하철과 경찰분실물센터까지 확인했지만 올라온 습득물 중 내것은 없다.


절판된 귀한 해외 교재를 2주 전에 큰애가 먼 동네 도서관에서 발견하여 빌려왔다. 고마운 누군가가 귀한 동물복지 관련 저서들을 도서관에 기증했나 보다. 그런데 논문을 쓸 때까지만 해도 어려움을 몰랐는데 작년부터 갑자기 침침해진 내 눈에는 책의 글씨가 작아서 불편했다. 읽는 속도가 컴퓨터 자료 읽기보다 훨씬 느리다. 중요표시를 할 수 있도록 확대복사가 가능하다는 제본소의 도움을 받아 4권을 만들었다. 두 권은 노안이 된 내 눈과 고도근시인 큰딸을 위해, 다른 2권은 고단한 학위 논문에 좌절하는 나를 늘 격려해 준 대학원 동기 둘에게 선물할 생각이다.   


*낯가림 없이 잘 자라는 클레로덴드럼 톰소니에(Clerodendrum thomsoniae)/ 일명 클레로덴드롱, 덴드롱(꽃말: 행운, 축복, 우아한 여성)


마침 마음이 아픈 환자 대상으로 동물매개심리치료 연구수업을 함께 했던 동기가 전화를 해왔다.  한창나이라 그녀의 대학 강의 일정이 몹시 바쁜 걸 아는 내게 다음 주 점심을 함께 하자는 제안을.  그동안 조금 가라앉았던 기분이 그녀 덕분에 토요일 오후부터는 상쾌해졌다. 더위에 목마른 클레로덴드럼 꽃에 물을 주면서 양산이 없이도 주말 내내 행복했다.


하루를 정리하고 일요일 늦은 밤에 컴퓨터를 끄려는데 문득

"하늘색 양산,

나는 네가 참 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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