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함께 하던 반려견을 먼저 떠나보낸 초등학생 아이의 마음을 어찌 알아줄 수 있을까.
그저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아이의 손을 꽉 잡고 그녀의 보폭에 맞춰 나란히 걸어갈 뿐이었다.
고민 끝에 언젠가 해줘야지 했던 말을 건넨다.
"희수야. 눈에 보이지 않는 건 항상 함께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선생님은 눈에 보이잖아. 그래서 손을 잡고 있을 때도 있고, 몸이 떨어져 있을 때도 있지?
그렇지만 선생님이 희수를 사랑하는 마음. 그런 보이지 않는 건 언제나 어디서나 함께 할 수 있는 거야.
찰리는 이제 우리와 언제나 항상 함께 하고 있어."
부족한 조수는 오늘도 구차한 말들을 덧붙였다.
희수는 자신의 반려견을 그렸다.
검정 단모 닥스훈트, 활달하고 사람을 좋아하던, 다리 하나가 선천적으로 작게 태어난. 사랑스러운 찰리.
희수의 그림 속 찰리는 건강한 네 다리로 하늘을 달려간다. 마치 천사처럼 구름 속을 자유히 유영한다.
희수는 찰리를 위한 제사상을 그린다. 그곳에는 찰리가 평소 좋아하던 쿠션과, 좋아했으나 건강 때문에 못 먹게 한 사람 음식들이 그려진다.
정성을 담은 그림은 힘을 갖는다.
선한 믿음에 기반한 상상을 하게 한다. 찰리가 행복할 것이란. 찰리에게 이 마음이 닿을 거란.
문득 이 어린아이의 진중함에서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천천히 그러나 담담히 자신의 슬픔을 들여다보고. 너무 성급하지 않게 그 슬픔을 감내하고. 또 그걸 그림으로 그리며 그리운 대상을 대면하는 이의 성숙함이 날 눈물짓게 한다.
할머니의 죽음은 그녀의 삶을 더욱 깊이 알게 한다. 어느 때보다 그녀와 함께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어린아이의 순수한 용기를 가지고 다시금 그녀의 시간을 나의 글로 그림으로 영화로 재현한다.
눈에 보이지 않아 영원히 함께 할 이를, 눈에 보이게 재현해 내 지금 나의 몸으로 대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