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 일인지 평소보다 하진이가 집중을 못한다. 지루한가?
아! 이럴 수가. 이 미흡한 조수의 탓이다. 최근 하진이가 그림이 많이 늘어 이 조수가 욕심을 부렸다. 평소 그리던 스케치북보다 두 배 정도 큰 캔버스를 아이 앞에 턱 갖다 놓은 거다.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아 풀이 죽은 아이에게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건지 말해주는 것만큼 좋은 격려도 없다.
“하진아! 이거 어렵지. 어려운 게 당연한 거야. 하준이 몸이 작은데 캔버스는 엄청 크지? 지금 되게 어려운 거 하고 있는 거야.”
그 어떤 말보다 단호한 목소리로 단단히 일러준다.
잔뜩 풀이 죽은 아이의 얼굴에 안도감이 깃든다. 처진 눈썹의 패배감은 이내 어려운 일을 해내고 있다는 자긍심으로 바뀐다.
그렇다! 아이들은 나와 다른 몸을 가지고 살아간다. 어린이의 몸을 옆에서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 작은 손의 움직임이, 얼굴에 난 작은 눈코입이 집중의 근육을 짓는 게 얼마나 신기한지 모른다. 어른의 손으론 너무나 당연한 조절이 그 작은 손엔 버겁다. 어른의 눈엔 당연히 보이는 게 그 좁은 시야엔 한눈에 담기지 못한다.
그림은 한순간에 훅 늘어버린다. 내가 잘 가르쳐서도, 아이가 아주 열심히 그려서도 아니다. 그저 몸이 자라서 이전에 안되던 힘조절이 잘 되고, 이전에 못 보던 비례감이 자라나는 걸지 모른다. 그럼에도 꾸준함이 중요한 건 계속해서 그릴 때에만 그 성장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손이 작아서 그래. 키가 커지면 쉽게 보일 거야. 처음 하는 거잖아. 어려운 게 당연하지. 계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확 쉬워질걸?”
아이들의 성장을 보면 실로 시간이 해결해 줄 부분이 너무나 많음을 깨닫는다.
가끔 이 조수는 어린이 작가님의 그림을 유려한 붓질로 망치는 무능을 범한다. 때때로 어린이 작가님은 그 유려함을 흉내 내려 스스로의 것을 버리고 따라 한다.
“우와! 선생님 진짜 잘 그리네요..” 라며 기가 죽기도 한다. 그럴 땐 재빨리 말해줘야 한다.
“너도 선생님 나이 되면 이 정도는 그려. 나이 들면 이거 정말 식은 죽 먹기지.”
이런 식으로 말하면 일단 식은 죽 먹기가 무슨 뜻인지 설명해줘야 하고, 다른 표현으론 누워서 떡먹기가 있는데 그건 사실 매우 어렵고 위험한 행위임을 꼭 고지시켜줘야 한다.
키 크는 것도 싫고 나이 먹는 것도 싫다던 하진이의 얼굴에 노화에 대한 기대감이 잠시 반짝였다. 내가 대학원에 다니니 적어도 대학은 졸업했고 그럼 스물넷 보단 나이가 많겠다고 유추하는 이 똑똑한 아이는, 그럼 선생님이 자신의 엄마보다 나이가 많냐 묻는다. 아이의 눈은 시야도 좁지만 노화의 척도를 분간하는데도 취약하다.
하진이는 “세상에서 가장 ~ 하는 건 뭐예요?”라는 식의 질문을 자주 건넨다. 그때마다 나는 모든 건 상대적이기에 숫자로 표현할 수 있는 것 말고는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그러하다 말할 수 없다 말해준다.
그렇다. 어려움은 상대적이다. 그렇기에 지금 내 몸집에 비해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객관적인 판단이 필요하다.
얼굴에 눈이 박힌 난, 스스로의 몸을 볼 수 없기에, 때론 내 몸집에 맞지 않는 일을 택하고 좌절한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는데, 왠지 모를 충만함이 가득했다. 이건 뭘까 곰곰이 생각해 보는데 ‘아, 내가 아이들에게 건넨 그 모든 말들을 내 몸이 듣고 있었구나!’ 깨닫는다.
하진아 사실 박소현 선생님도 오늘이 처음이었어.
처음이라 서툴고 어려웠던 거구나. 내 손은 작은데 너무 큰걸 한 번에 잡으려 했구나.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어려운 게 당연한 거구나. 차차 시간이 흘러 익숙해지면 더 잘할 수 있겠구나.
어린이는 과정 중이다.
아니, 사실 삶의 모든 순간이 죽음을 향한 과정인데, ‘어른’이란 단어는 그 과정중임을 지우려 애쓰게 만든다. 아이들을 향한 모든 격려와 바르게 함과 훈육의 말이 실은 날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과정 중의 선생님을 아이들 또한 기다려준다. 이 서툰 조수의 실수를 봐준다. 아주 많이, 작고 넉넉한 마음씨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