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아프고 죽음이 생각보다 가까이 있음을 몸으로 느끼자, 그제야 암, 투병, 장례, 죽음 등의 단어가 내게 의미로 다가왔다. 현대의학에서 암은 죽을병이 아니라는, 사실은 사실이 아닐 수 있음을 알게 됐다. 부끄럽게도 난 당사자가 되어서야 넘기고 뱉어왔던 단어들의 무게를 알 수 있었다. 사람은, 적어도 나는 자신이 경험한 일에 한에서만 공감할 수 있음을 철저히 깨달았다. 그렇기에 다른 이들에게 슬픔을 강요할 이유도, 남들의 무심함에 상처받을 필요도 없었다.
고교시절 아주 친하진 않았지만 내가 많이 애정했던, 친해지고 싶었던 친구 생각이 났다. 고등학교 2학년, 그 친구의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정말 급작스레 돌아가셨다.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한 가지는 그때 그 장례식장에 가지 않은 거다. 실기시험 전날이라 마음이 급했던 것도 있었다. 동시에 장례식이라는 낯선 상황에 혼자 찾아가기가 괜스레 겁이 났다. '내가 가도 될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같은 반이었다면 아마 학급 친구들과 다 같이 우르르 갔을 거다.
어느 날 아침 학교에 와보니 책상 위에 쪽지가 놓여 있었다. 고맙다는 손글씨가 적힌 작은 쪽지였다. 그 친구는 장례를 마치고 미술과 학생 120명 전체에게 쪽지를 적어 모두가 등교하기 전 아침 일찍 책상 위에 두었다. 마음 한편이 부끄러웠다. 이후 난 결코 어떤 일이 있어도 어떤 상황에서도 슬픔을 함께 나눌 공간은 남겨두겠노라 다짐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한번 만난 이후 사 년간 왕래 없이 지냈고 그저 인스타로만 근황을 간간히 보았다. 그러다 졸업전시를 한다는 게시글을 보았다. 당시 난 종강을 앞두고 많은 시험과 과제, 그리고 나의 졸업전시 마감으로 외부와 단절되어 살았고 시간에 쫓기며 살았다. 그러나 그 친구의 마무리이자 새로운 출발을 꼭 응원해주고 싶었다. 정말 오랜만에 연락을 해 만난 친구는 여전히 맑고 투명했다.
내가 사랑하는 모습을 한 친구가 작품에 대해 특유의 느린 말씨로 찬찬히 설명해 줬다. 그 느린 말엔 아버지에 대한 잔잔한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난 친구의 끝과 새로운 출발을 응원하러 갔는데. 어떤 일은 시간이 흘러도 끝없이 잔잔하게 베여 살아가는구나. 미안한 마음이 왈칵 들었다.
할머니의 장례가 끝나고 얼마 안 있어 대학에서 만난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학교 다닐 땐 많이 친해지진 못했지만 친해지고 싶었던, 졸업 이후 외부 작업실을 함께 사용하게 되면서 더 깊은 사이로 발전한 친구였다. 부고 소식을 접하고 바로 빈소로 향했다. 버스에서 급하게 장례 예절에 대해 찾아보았다. 혼자 장례식에 찾아간 건 처음이라 향을 피우는지 묵념을 하는지 그 순서도 방법도 어려웠다.
빈소가 차려지자마자 거의 바로 간 거라 친척 몇 분 외엔 조문객이 없었다. 너무 이른 시간에 왔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처음 보는 친구 아버지의 사진 앞에 국화꽃을 놓고, 눈을 감고 손을 모아 기도했다. 그러곤 내 작은 몸으로 나보다 더 작은 친구의 몸을 꽉 안아줬다.
둘째 날엔 다른 대학 친구들도 조문을 왔다. 나도 저녁시간에 맞춰 자리를 함께 했다. 그들도 나와 같이 장례식이 낯설었다. 교회에 다니는 한 친구는 기독교식은 향을 피우지 않고 국화를 놓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절을 해야 하는 건지 갑자기 헷갈려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고 한다. 식사를 하며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지지 않도록, 친구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돼주고자 이런저런 웃기는 얘기를 했는데, 의도와는 달리 친구에게 쓸쓸함만 남기게 된 거 같아 미안했다.
마지막날 아침, 장지에 함께 가는 건지 아닌지 잘 모르겠었지만 우선은 빈소에 찾아갔다. 다른 가족분들은 장례차를 타고 이동을 하는데, 친구는 멀리서 오는 다른 가족을 기다렸다 함께 택시로 이동한다고 했다. 일행이 오기 전까지 삼십여분의 시간을 장례식장 로비에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같이 앉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장지를 같이 가도 되는 거였는데, 난 가족들만 가는 자린데 괜히 끼는 걸까 봐 가지 못한 게 미안하다. 여차저차 난 서툴고 어디 하나 빠진듯한 조문객이었다.
장례예절은 지금도 잘 모르겠고 어려운 부분이지만 그저 함께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할머니의 장례를 지나며 배웠다. 빈소가 비지 않는 것만큼 유가족에게 위로가 되는 것도 없을 테다. 그저 너무 적막하지 않게 어쩌면 슬플 정신이 없도록 사람이 오고 가는 게 가장 큰 위로였다. 예전엔 허례허식 같던 화환들이 막상 할머니의 장례식이 되자 없었다면 아쉽겠단 생각에 그 의미를 알게 됐다.
할머니가 보고 싶고 해준 음식이 먹고 싶고 목소리고 듣고 싶고 보단, 내 손을 꽉 잡아주던 두툼하고 사뭇 거친 손길, 꽉 껴안을 때 생각보다 아담했던 어깨, 그 몸과 몸의 마찰과 압력이 그립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한참 동안 꿈에 할머니가 나왔는데, 얼굴은 똑같아도 손에 잡히지 않는, 따뜻한 압력이 없는 공허함이 오히려 부재감을 자아내 힘들었다.
서로 다른 몸을 가졌기에, 내 발 밑의 가시가 다른 이의 총상보다 더 첨예하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그저 내 경험에 빗대어 상대의 고통을 유추할 뿐 그 고통을 오롯이 느낄 수는 없다. 그럼에도 서로 다른 몸과 몸이 체온을 나누고 맞닿는 그 감각으로 상실의 아픔을 달래어 본다. 난 그다지 훌륭한 조문객이 아니지만, 당신의 상실이 나의 것과 동일할 수 없지만, 작은 몸으로 미온한 체온과 최선의 압을 건넨다. 우리의 상실은 같지 않아도 닿을 수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