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코스: 가진항-거진항. 13.7km
해파랑길 48코스는 가진항에서 거진항까지 이어지는 13.7km의 바닷가를 따라 걷는 구간이다. 명태의 본고장인 거진항에 서는 이제 명태를 보기 힘들어 고성명태 산업관광 홍보지원센터의 닫힌 문이 더 안타깝게 느껴진다. 반암항을 지나 북천과 남천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간성읍에 이른다. 향나무 전설이 있는 향목리의 해안으로 새로 난 길을 따라 걸으면 요즘 한창 인기가 있는 전망 좋은 카페를 만날 수 있다. 아기자기한 가진마을을 바라보며 걷다 보면 가진항이 저 앞으로 성큼 가까워진다.(41코스-49코스까지는 북에서 남쪽으로 진행하였다.)
명태의 고장을 지나다(거진항-명태 웰빙타운-반암해변-북천철교)
거진항을 천천히 지나간다. 아직 잠이 덜 깨 있던 이른 아침의 풍경과는 달리 건어물 상점들이 문을 연 거리엔 생기가 돌고 있다. 건어물 가게에 걸어 놓은 북어들이 과거를 되살려 준다. 거진항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최대의 명태 산지였다. 넘치는 명태 덕분에 신선한 명태의 아가미를 무채와 함께 버무린 명태 서거리나 명태식혜 같은 음식들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지금은 가자미를 말리는 모습이 더 많아졌지만 동해안에서 아주 조금씩이나마 다시 명태가 잡히기 시작했다니 머지않은 미래에 이곳에서 다시 넘치는 명태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래 본다. 거진해수욕장에는 돌을 쌓아 만든 방사제가 촘촘히 설치되어 있다. 모래 가득해야 할 해변에 모래 대신 커다란 돌들이 놓여 있는 풍경은 자주 보아도 낯설기만 하다. 근처에 있는 반암항에는 퇴적되는 모래의 양이 너무 많아 배들의 출입이 어려워 해마다 모래를 준설해내고 있다. 이런 현상은 동해안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거대한 테트라포드를 쌓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전에 파도와 모래의 흐름을 먼저 읽어 원인을 규명하고 그에 맞는 해안의 복원과 관리를 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거진해변의 남쪽에 트럭을 개조해 만든 멋들어진 캠핑카가 서있다. 구름인 듯 파도인 듯 그려져 있는 무늬 너머로 파도가 흰 포말을 일으키며 부딪히고 있다. 캠핑카의 뒷문에는 '순간을 지배하는 사람이 인생을 지배한다'라는 말이 쓰여있다. 내 인생을 스스로 정의하고 사람 없는 해변에서 파도를 벗 삼아 지내는 저이는 정말 자유로운 사람일 것 같다. 고성 명태웰빙타운 앞을 지나 자산천 하구 위에 놓인 가진 1교를 건넌다. 이 다리 아래에는 멸종위기식물인 독미나리가 상류에서 떠내려와 자리를 잡고 있다. 무심코 지나치는 별다르지 않아 보이는 공간에도 뜻밖의 존재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세상을 좀 더 찬찬히 관찰하게 된다. 소중한 사람은 내 주변에 있다는 것도 결이 같은 이야기이다.
해변에 서서 바다를 독차지하고 있는 아파트를 지나면 송포리의 도로변에 사열하듯 줄을 맞추어 바다 쪽으로 향해 서있는 소나무숲을 볼 수 있다. 이 소나무들은 이 마을의 이름과 깊은 관련이 있다. 송포리는 아랫마을과 윗마을로 구분되는데 아랫마을은 마을 뒷산의 모습이 말이 누워 있는 모습에, 소나무가 잘 자란다고 하여 송마직리(松馬直里)라 불렸었다. 그 후에는 소나무숲 앞에 호수가 있다고해 송호리(松湖里)로 불렀다. 윗마을은 자산천 옆으로 큰 늪(浦)이 있어서 포남리(浦南里)라고 불렀는데, 송호리와 포남리 두 마을을 합해 송포리(松浦里)로 부르게 되었다. 대부분의 마을 이름은 그 마을의 환경이나 역사적인 사실들을 포함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송포리 길가의 소나무숲을 보면서 마을앞 호수에서 수영을하고 소나무 그늘에서 하루를 쉬던 이 마을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향나무 마을을 지나다(북천철교-남천하구-가진리-가진항)
널찍 편평한 바위들이 마을 주변과 바닷속에 많아 이름 붙여진 반암마을을 지나 북천철교를 막 건넜을 때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가 해파랑길을 걷는다는 걸 알고는 1박 2일을 함께 걷겠다고 연락을 준 것이다. 과거 강원도까지 직진 걷기를 하는 그와 함께 하지 못한 미안함이 있었는데 그의 배려로 해파랑길에서 함께 길을 걸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늘 나무처럼 살기원했고, 언제나 나무같은 사람이다. 가진항에서 기다리는 지인을 만나기 위해 발길을 서두른다. 마침 북천하구의 바다로 나가는 물길의 사구 한쪽이 무너지며 많은 바닷물이 밀려 들어왔다. 바닷물과 민물이 서로 격렬하게 마주치며 물살을 일으키는 것이 나의 흥을 더 키워준다.
북천에서 남천에 이르는 구간은 봉호리와 동호리가 있으며, 바닷가의 사구습지와 곰솔숲, 남천 주변의 넓은 농경지를 지나가야 한다. 별다른 것들이 없기에 농사짓는 이 아니면 사람을 보기 어려운 곳이었는데 이곳에 새로 도로가 개설되면서 지금은 지나가는 차량들이 증가하고 있다. 남천 하구는 다리가 없어 다리가 있는 상류까지 길게 돌아가야 했었는데 지금은 1분이면 넉넉히 다리를 건널 수 있다. 남천의 남쪽은 향목리(香木里)이다. 고성군의 마을 소개에는 1285년에 울릉도에서 이마을로 이주한 정씨 집안의 선조가 3그루의 향나무를 가지고와 심었는데 이것이 크게 자란 뒤 마을 이름을 향목리라 부르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두 가지의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한다. 첫째는 울릉도에서부터 향나무를 가져오기 보다는 동해안에 많이 자생하는 향나무를 정씨의 선조가 많이 옮겨 심고 가꾸어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싶다. 신안군 안좌도에도 향목리라는 마을 이름이 있는데 이곳의 경우 마을에 향나무가 많이 자라 붙여진 이름이다. 다른 한 가지는 마을 앞에 있는 남천의 하구에서 매향 의식을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매향의식은 고려말 조선초에 어수선한 나라의 분위기 속에서 현실의 안정과 미륵불이 오시는 때를 위해 향나무를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하구에 매립하는 행위를 말한다. 같은 고성군의 삼일포에서 매향을 한 내용을 기록해 놓은 매향비가 발견된 것을 생각하면 이 생각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향목리를 지나 가진리에는 바닷가에 말끔하게 건물을 지어 놓고 빵과 커피를 파는 큰 카페가 들어서 있다. 이 외진 곳을 사람들이 어떻게 찾아올까 싶은데 그것이 기우라는 듯 주차장이 꽉 들어찰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최근에 개통된 해안에 새롭게 뚫린 도로는 이곳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불러올 것이다. 잠깐 들러보고 싶지만 기다리는 이가 있는 지금은 남은 길을 서둘러야 한다.
길가에서도 나즈막히 파도치는 소리가 들리는 가진리는 작고 아담한 마을이다. 버스정류장 옆 이대숲도 자그마한 이 마을의 언덕 위에는 붉은 벽돌로 지은 가진 교회가 서있다. 교회 앞의 폐가와 벤 나뭇가지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놓인 길가의 모습과 대조를 이룬다. 여기서 조금 더 가 언덕길을 지나 바다 쪽으로 내려가면 가진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