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걷는 해파랑길,관동 8경 청간정

46코스 : 장사항-삼포해변. 15.2km

by 물냉이

해파랑길 46코스는 장사항에서 삼포해변까지의 15.2km 구간이다. 문암리의 선사유적지와, 능파대, 천학정, 청간정 등의 명소들을 연이어 만날 수 있다. 삼포해변, 자작도 해변, 백도해변, 문암해변, 교암해변, 아야진해변, 청간해변, 천진해변, 봉포해변, 캔싱턴해변으로 이어지는 해변은 고성의 맑고 깨끗한 바다환경을 대표한다. 46코스는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걸었다.


우리가 남긴 흔적들(삼포해변-문암리-능파대-천학정)

지인이 준비해 온 아침을 먹고 다시 해파랑길을 걷는다. 삼포해변 너머 멀리 보이는 자작도는 높은 파도에 잠길 듯 위태로워 보이지만 섬은 그저 말없이 서있다. 조바심을 내는 것은 항상 사람들이다. 우리는 파도의 움직임에 감탄하며 사람 없는 해변을 즐기며 걷는다. 자작도해변은 늘 파도를 타는 이들이 북적거리는데 오늘은 아무도 없다. 이런 날엔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재즈 몇 곡이면 바다가 꽉 찰 것 같다. 자작도는 백도라고도 부른다. 섬이 두 개가 있는데 큰 것은 백도, 작은 것은 소백도라 부르고 백도와 소백도를 합해 자작도라고 부른다.

20200217_083758.jpg 파도 속에 잠길 듯 위태로워 보이는 자작도
20200217_084327.jpg 멀리 숙소가 보이는 삼포해변, 걸어온 길 뒤로 발자국이 찍혀 흔적이 된다.
20200217_084526.jpg 격하게 밀려오는 파도는 우리가 만든 흔적을 깨끗이 지워버린다. 다음 여행자는 또다시 흔적 없는 바다를 만나게 된다.


자작도해변을 지나 바닷가의 소나무가 우거진 산을 바라보며 문암리로 향한다. 문암진리에는 농사를 짓지 않는 널찍한 나지가 있다. 바로 사적 제426호로 지정된 문암리 유적지이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지인 이곳은 사람이 살던 집터와 밭터, 무덤터가 함께 발견되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이곳은 바닷가이지만 나지막한 산지의 소나무숲이 파도의 피해를 막아주는 아늑한 곳으로, 주민들이 집을 짓고, 밭농사를 지으며 행복하게 살다 집 근처에 묻히는 마을이었던 것이다. 다만 그냥 보아도 터는 참 좋은데 문화재구역이라는 안내판을 빼면 그 어떤 것도 신석기시대임을 암시해주는 것이 없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20170321_102953-46코스.jpg 소나무와 바위가 문암리 유적지를 지키고 있다.
20200217_091144_46코스 문암리.jpg 문암진리 마을의 집 마당에 서있는 은행나무


전깃줄에 걸려서 그랬던 것일까? 문암진리 마을의 어느 집 마당에 서있는 은행나무는 위쪽으로 올라가는 가지가 모조리 잘려 있다. 은행이 많이 달리는 암그루 일지도 모른다. 요즘은 은행을 수확하기보다는 냄새 때문에 싫어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이래저래 덩치 큰 몸으로 매년 새 가지를 내느라 애쓰는 은행나무의 모습이 애처롭다. 낚싯배들이 모여 있는 백도항을 지나면 구멍이 숭숭 뚫린 기암들이 서있다. 기암을 그냥 볼 수 있을 정도로만 해놓았으면 좋았을 것을 데크와 벤치를 설치해 놓아 자연경관을 망쳐버렸다.

옛날 삼척부사가 부친상을 당해 문인석을 세우려 했는데 고승이 문암리에서 문인석을 만들면 후대가 번창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이 마을에서 문인석을 만들었다. 그러나 배를 타고 삼척으로 가야 하는데 바다가 계속 풍랑이 일어 삼척부사는 이 마을에서 문인석을 놓아주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며 돌아갔다. 그 뒤로 마을에 물고기가 잘 잡히고, 문인석에 기원하면 아이를 얻는 등 좋은 일만 생겼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문인석을 서낭으로 모시고 있다. 기암 중에는 신랑 신부가 입맞춤하고 있는 듯한 모양의 바위도 있는데 이곳에 풀과 나무가 자라면서 원래의 모습을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가 되어버렸다.


20210711_102438_백도항 서낭당.jpg 백도항의 기암 앞에 설치한 그네의자
20170321_104446_HDR46코스.jpg 백도항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의 기암
20170321_104704_HDR46코스.jpg 신랑과 각시를 떠올리게 하는 바위
20170321_104732.jpg 마을에서 서낭으로 모시는 문인석


문암항에는 기암들이 바다와 마주하고 있는 능파대가 있다. 강원 감사가 이곳을 순시하던 중 파도에 부딪치는 바위들을 보고는 그 경관이 파도를 능가한다고, 능파대(凌波臺)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능파대는 바위가 구멍으로 이곳저곳이 움푹하게 파여 있는데 이것을 타포니라고 한다. 타포니는 주로 바람이나 파도 등에 의해 일어나며 능파대는 바다의 염분에 의해 화강함에 풍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능파대에 올라가 보면 문암천의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오는 곳은 경관이 아름답고 물놀이하기도 좋아 여름이면 이곳에서 어린이가 있는 가족들이 많이 물놀이를 한다. 낚시나 투망을 하는 사람들도 문암천이 바다와 만나는 하구를 즐겨 찾는다. 해파랑길은 주로 겨울에 걷기 때문에 물놀이는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여름이라면 주저 없이 풍덩 뛰어들었을 듯한 장소들이 도처에 흩어져 있다.

20210711_100208_능파대에서본 전경.jpg 능파대에서 바라본 능암천 하구와 바다가 만나는 곳에서 물놀이를 하는 사람들
20210711_100812_46코스 능파대.jpg 능파대의 타포니 현상으로 구멍이난 바위에서 바라본 주변 경관
20210711_101401.jpg 능파대 주변에는 다양한 해초류와 어류들이 분포해 스킨스쿠버를 즐기는 이들도 많다


자연을 보는 법(천학정-아야진해변-청간정-봉포리-장사항)

교암해변을 지나 천학정 입구에 선다. 이곳엔 마을의 서낭당이 있고, 서낭당 옆 바위 위에 이 지역의 면장을 기념하는 비가 서있다. 이 비 아래 정확히 어떤 글자인지 구분이 어려운 한자가 새겨져 있는데 눈으로 보아서는 알아보기가 어렵다. 언제고 넉넉한 시간을 잡고 이곳의 각자를 확인해 보고 싶다. 알려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궁금함은 천성인 것 같다. 자연을 살피고 순환의 이치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고, 이제 조금 아나 싶었는데 세상을 보니 더 많은 모르는 것들이 나타났다. 천학정은 1931년에 세워진 정자로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주변의 빼어난 경관과 정자 위쪽으로 난 소나무숲길이 잠깐이지만 산길의 흥취를 더해준다.

DSC00215천학정.JPG 천학정 입구의 서낭당과 기념비
20170321_113541-46코스.jpg 소나무숲과 어우러져 바다를 향하고 있는 천학정


아야진항에 도착해 성게 미역국을 먹는다. 따끈한 국물이 몸으로 들어오니 마음에도 여유가 생기는 것 같다. 걸을 때는 역시 식욕이라는 1차적인 욕구가 채워져야 한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이틀을 함께해 준 지인과 이곳에서 헤어지기로 한다. 다시 남은 길을 떠난다. 혼자일 때는 길에 집중하게 되니 그만큼 이동 속도도 빨라진다. 청간리의 해변은 파도가 날라온 모래와 잔돌들이 길 위에 쌓이고 있다. 이곳은 도로와 해변의 차이가 크지 않아서 파도의 영향을 많이 받는 구간이다. 바다와 격리된 도로만을 걷다가 이런 곳을 만나면 정말 바닷가를 걷는다는 기분이 든다. 해변 저 쪽에 관동팔경의 하나인 청간정이 보인다. 청간정의 앞쪽은 이대가 숲을 이루고 있다. 자전거길을 수리 중이라 돌아가라는 안내판이 서 있지만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기는 너무 아쉬워 접근해 보니 걸어서 가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백 년 넘은 굵은 소나무들의 붉은 수피를 바라보며 청간정에 오른다. 이승만 대통령의 현판과 최규하 대통령이 쓴 한시를 본다.

악해상조고루상(嶽海相調古樓上)

과시관동수일경(果是關東秀逸景)

설악과 동해가 서로 만나 어우러지는 고루에 올라보니

과연 관동의 빼어난 경치로구나


한시까지 아우르는 그의 학문적 넓음을 글로 확인한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위기에 조화를 이야기해야 했던 그의 한 면을 그대로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이승만이나 최규하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 당시의 지역주민들은 대통령이 와서 자신의 마을에 있는 정자에 직접 현판을 써주니 자긍심이 컸을 것이다.

20200217_112435.jpg 아야진의 횟집에서 성게 미역국을 먹었다
20200217_112840.jpg 아야진항에 정박해 있는 어선들
20200217_113826.jpg 청간해변의 파도에 쓸려온 모래
20200217_114340.jpg 멀리 청간정과 이대 군락이 보인다
20200217_114756.jpg 천진천하구의 모습
20170321_130229-46코스.jpg 이승만 대통령이 쓴 청간정 현판
20170321_130528_HDR.jpg 청간정


청간정을 떠나 천진해변으로 가는 길 저기 서쪽으로 눈 쌓인 설악이 서있다. 설악은 언제나 웅장한 모습으로 주변을 거느린다. K2처럼 아주 높은 산은 아니지만 나지막한 산들이 군웅할거하는 한반도에서 설악산은 높고 진중한 산이다. 우리는 이 산을 바라보기만 해도 위로를 받는다.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는 삶. 참 먼길이다. 천진해변과 봉포해변의 육지 쪽으로는 천진호와 봉포호가 있다. 7번 국도에 의해 물길이 끊겼지만 이 둘은 모두 바다와 관련 있는 석호이다. 봉포호는 경동대학교의 교정 안에 있고, 천진호는 남쪽으로 고성제생병원의 콘크리트 옹벽에 가로막혀 있고, 북쪽엔 최근 지어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두 호수 모두 훼손의 위기에 있지만 고성 일대에서만 자라는 각시수련이 자라고 있다. 천진호에는 멸종위기종인 순채도 함께 자라고 있다. 향후 사람들의 이용도는 점점 높아질 것이므로 희귀 식물들을 관광자원으로 적극 활용하면서 보전하는 방법을 고민해보아야 한다.


20200217_115531_46코스 청간정.jpg 천진해변을 가는 도중에 눈 쌓인 설악을 만났다.
20200407_130942.jpg 천진호 전경


고급 펜션이 있는 천진해변을 지나 봉포해변으로 간다. 천진해변과 봉포해변이 있는 봉포리는 마을의 식당에서 여유를 가지고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다. 혼자 길을 걷다 보면 관광지의 식당보다는 한 골목 더 들어가 마을의 주민들이 이용하는 식당을 찾는 것이 훨씬 마음 편하다. 봉포항을 지나 켄싱턴해변에는 고성 산불로 인해 곰솔숲이 다 타버렸다. 바닷가에 있는 소나무들마저 타버린 것을 보니 산불의 확산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이곳에서부터 속초에 이르기까지 산불의 흔적들을 마주하게 된다. 산불은 산림뿐만이 아니라 주거지의 피해도 크다. 산불에 타버린 후 아직까지 수리하지 못한 채 방치된 집들도 길가에서 볼 수 있다. 용촌리에서 속초 카페거리를 접어들면서 경계는 고성에서 속초로 바뀐다. 행정구역은 지역을 가르지만 산불을 막지는 못했다. 장사항으로 가는 언덕에 있는 해양충혼탑에도 산불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 새로운 묘목을 심어 놓았다. 산불은 모든 것을 태웠지만 그 자리에서 새로이 싹을 틔우는 것이 자연이다. 종자은행을 가지고 있는 이 지역 산림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는다. 우리는 언제나 위기에서 다시 일어났다는 것을 떠올리며 바닷가의 서낭당이 보이는 장사항으로 접어든다.


20200217_120851_46코스 천진해변 펜션.jpg 천진해변 주변에는 고급 펜션들이 늘어서 있다



20200217_121610_46코스 봉포해변.jpg 천진해변에서 바라본 죽도
20200217_122913_봉보항 남쪽 산불피해해변.jpg 켄싱턴 해변에 있는 곰솔숲이 산불로 모두 타버렸다.
20200217_130714.jpg 산불이 난 지역에 다시 나무가 심어지고 산이 푸르러지기를 기원한다.
20200217_131044.jpg 해경충혼탑 주변에도 다시 나무를 식재하였다
20200217_131338.jpg 바다가 보이는 산자락의 서낭당이 있는 장사항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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