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걷는 해파랑길, 해와 바다와 파도의 노래

44코스 : 수산항 - 설악해맞이공원. 12.3km

by 물냉이

해파랑길 44코스는 수산항에서 설악해맞이공원까지의 12.3km 구간이다. 길을 걸으며 해변에 있는 크고 작은 공원을 만날 수 있고, 각각의 공원엔 다양한 조형물들이 여행자를 반겨준다. 낙산사와 동해신묘, 오산리 선사유적 같은 역사유적과 자연환경이 어우러져 걷기 여행자의 발길을 잡는다.


자연이 예술이다(설악해맞이공원-물치교- 정암해변- 후진항-낙산사)


설악해맞이공원에는 '낙원으로', '연인의 노래', '사랑', '초대받은 사람' 등 여러 현대작가들의 조각품이 전시되어 있다. 길을 걷는 상황에 조각품들을 천천히 다 감상할 수는 없지만 눈에 들어오는 작품들을 관심을 가지고 감상하며 지나간다. 동해안의 곳곳에 있는 조형물들의 작가들이 세계적인 작가로 성장하길 바래본다. 그러면 우리는 길을 걷다 거장들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대청봉에서 발원해 동해로 유입되는 쌍천은 속초와 양양의 경계이기도 하다. 쌍천 남쪽의 물치해안공원에는 황금연어 상이 있다. 연어의 옆에는 붉은색의 알이 함께 놓여 있다. 연어와 은어, 황어가 찾아오는 쌍천은 최근 하도 안에 둔치를 만들어 유채를 심어 경관을 조성하였고, 하도는 매번 공사를 통해 교란을 일으키고 있다. 연어를 상징물로 해 관광과 홍보를 하는 만큼 연어를 위한 환경개선에 좀 더 비용을 투자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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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해맞이공원의 조각 '연인의 노래'와 물치해안공원의 황금연어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물치교를 건넌다. 물치교에서 정암해수욕장으로 향하는 해변에 앉는다. 해변을 채우고 있는 주먹만 한 몽돌들은 파도가 밀려왔다 물러날 때면 저무는 해의 잔광을 받아 붉은빛으로 반짝인다. 파도와 몽돌들이 부르는 노래는 정태춘, 박은옥 부부의 노래들처럼 조화롭다. 소라의 집처럼 만들어 놓은 쉼터로 옮겨 편안히 음악을 감상한다. 스피커는 작은 목소리를 크게 만들어 주는데 스피커처럼 생긴 쉼터는 소리를 모아준다. 그 노래는 '사랑하는 이에게'였다가 '92년 장마, 종로에서'가 되기도 한다. 붉은 고추잠자리가 '윙윙윙' 파도 위를 맴돌다 어둠 속으로 가라앉을 때쯤 자리에서 일어 난다.


오늘은 정암해변이 보이는 곳에서 하루를 묵어 가기로 했다. 해파랑길 여정이 끝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지금 하루 정도는 호텔에서 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호사를 한 것은 아니다. 비수기이고 중저가 호텔이어서 주말 모텔 요금 수준이었다. 저녁은 식당에서 식사가 어려워 마트에서 사 온 컵라면으로 대신했다. 어두운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는 조명을 받아 파도의 포말이 더욱 극적으로 드러났다. 내일이면 50코스를 제외한 전구간을 걷게 된다. 50코스는 차를 이용해야 하기에 별도로 날을 잡아 따로 걸을 것이다. 밤이 깊어지니 호텔 앞 도로를 지나가는 차들도 끊기고 파도소리만 끊임없이 밀려온다. 격동하는 파도를 실컷 보았다. 오늘은 잠을 자지 않아도 좋은 밤이다.


20200217_170810.jpg 물치천 위로 어둠이 내려오고 있다
20200217_172039.jpg 정암해변으로 가는 길은 파도와 몽돌들이 만들어 내는 합창소리가 교향곡처럼 우람하게 들린다
20200217_173032.jpg 소라집처럼 생긴 벤치에 앉아 몽돌들의 노래를 듣는다
20200217_175958.jpg 정암해변의 낮과 파도
20200217_223401.jpg 정암해변의 밤과 파도


어둠을 붉게 물들이고 떠오르는 해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금방 노랗게 타오르며 중천을 향해 달려갔지만 물에서 갓 오른 해의 무르익음을 한참 동안 기억할 것이다. 이럴 땐 휴대폰 하나만 가지고 다니는 것이 아쉽지만 만일 카메라가 있었다면 나의 감동은 반 이하로 줄어들었을 것이다. 아침은 몸을 가볍게 유지하기로 하고 걷는다. 누군가 이른 아침부터 나와 몽돌해변을 거닐며 무언가를 줍는다. 파도에 떠내려온 미역인가? 아니면 예쁜 몽돌이라도 줍는 걸까.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일에 열심인 그를 지나 파도가 넘치는 후진항으로 향한다. 후진항과 전진리 너머 낙산이 보인다. 멀리서 보아도 바다를 향해 서있는 낙산사의 해수관음보살상은 장승도 아니면서 이정표가 되어 준다.


후진항을 지나 모래밭 가득 해가 들어차고 있는 설악해변에서 남쪽에서부터 걸어오는 두 사람을 만났다. 친구인 두 사람은 마음이 맞아 함께 해파랑길을 걸어왔고 이제 며칠만 더 걸으면 50코스를 마무리할 수 있어 기분이 좋다고 한다. 해파랑길을 걸으며 혼자 고행하듯 걷는 이들도 만났고, 친구들과 함께 걷는 이들도 여럿 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목적지를 향해 간다는 의식들이 분명해 자신 있고, 즐거운 상태였다. 특히 목적지를 얼마 남겨두지 않았을 때는 그런 모습이 더욱 선명했다. 그들의 남은 여정이 행복하게 마무리되길 인사로 건넸다. 그들도 나를 격려해 주었다. 설악해변을 앞에 두고 있는 강현면 전진리는 조용하고 밝은 마을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마을을 지나 낙산사까지 도로를 따라 긴 언덕을 넘는다.


20200218_072619.jpg 정암해변에 떠오르는 아침을 마주했다.
20200218_090650.jpg 바지런한 저이는 높은 파도 앞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20200218_091126_44코스 후진해변과 낙산.jpg 후진항을 파도가 넘는다. 후진항의 등대보다도 더 존재감을 드러내며 낙산의 해수관음상이 아침을 맞고 있다.


오봉산 낙산사라 쓰여 있는 일주문 앞에 도착해 곧게 하늘을 향해 솟은 소나무숲길을 따라 언덕길을 오른다. 2005년 양양군 강현면 사교리의 야산에서 발생한 산불이 낙산사까지 확산되었다. 산불에 보물 제479호인 낙산사 동종을 비롯해 낙산사가 보유하고 있었던 다수의 문화재들이 소실됐다. 이때 낙산사 주변의 100년이 넘는 소나무들도 불길을 피하지 못하고 모두 타버렸다. 지금 낙산사에서 볼 수 있는 소나무숲은 대부분 화재가 발생한 2년 뒤인 2007년 큰 소나무를 옮겨 심은 것이다. 낙산사의 산불 당시 보타전은 불에 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보타전이 다른 곳보다 저지대에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소나무가 아닌 활엽수들이 사찰을 둘러싸고 있어 산불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소나무숲이 많은 강원도에서 산불로부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적절하게 활엽수를 식재해 방어선을 구축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그 뒤로 어떻게 되었을까. 양양 산불 이후에도 고성, 속초, 강릉, 동해, 삼척 등에서 계속 산불이 발생하면서 동해안의 소나무숲은 큰 피해를 입어야만 했다.


20200218_094031_44코스 낙산사입구.jpg 낙산사 일주문. 일주문 안쪽으로 소나무숲이 울창하다.
20170322_140651.jpg 낙산사의 소나무숲길

입장료를 내고 홍예문을 지난다. 선열당 못 미쳐 낮은 울타리로 보호를 받고 있는 배나무가 한그루 서있다. 양양 일대에서 나는 배를 '낙산배'라고 부르며 15세기 조선 성종 때 나라의 주요 과수로 지정되어 진상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후로 맥이 끊겼으며, 1893년 개발된 일본의 장십랑(長十郞) 품종을 1915년 들여온 것이라고 한다. 배나무의 수령이 100년이 넘어 보호수로서의 가치가 충분하지만 이 배나무를 낙산배의 시조목으로 보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조선시대부터 길렀다는 낙산배의 흔적이 양양 일대에 있는지 조사해보고 원래의 우리 종을 찾는 작업을 꾸준히 해나갔으면 좋겠다. 원통보전으로 가는 입구의 사천왕문 옆에는 곧게 자란 굴참나무가 한그루 있는데 겨우살이가 자리를 틀고 있다. 요즘은 약으로 쓴다고 약초꾼들이 겨우살이를 싹쓸이 해가 산에 가도 보기가 쉽지 않은데 사찰 안에서 볼 수 있으니 운이 좋다. 보타전 뒤편의 숲 그늘에는 봄이면 복수초들이 꽃밭을 이룬다. 3월이면 낙산사의 복수초를 찾아오는 이들도 꽤 많다. 의상대와 홍련암을 넉넉히 돌아보고 다래헌을 거쳐 낙산해변으로 내려온다.

20170322_142813.jpg 낙산배의 시조목
20170322_142821.jpg 사천왕문으로 가는 길가의 소나무 조경수
20170322_143453-44코스.jpg 굴참나무와 겨우살이
20170322_145128.jpg 보타전 뒤편 언덕의 복수초 군락
20170322_145629.jpg 낙산사의 해수관음보살상
20170322_150524.jpg 낙산사에서 바라본 남쪽 전경, 낙산항과 낙산해변이 한눈에 들어온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낙산사-동해신묘-양양 남대천-오산리 선사유적-수산항)


낙산해변은 소나무숲이 우거진 곳이었다. 해수욕장이 유명해지면서 소나무숲은 점점 줄어들어 이제는 규모가 작은 소나무숲들이 있을 뿐이다. 그래도 낙산해변의 남쪽에는 소나무숲이 어느 정도 보전되고 있는데 그 끝자락에 '동해신묘지'가 있다. 동해신묘는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고려시대에 설립되었으며, 조선 시대에도 국가에서 제사를 주관하였다. 동해신은 용왕을 상징한다. 동해신묘는 원래 강릉의 안인포에 있었는데 이곳으로 이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안인진항에 용왕과 관련된 바위가 있는 것도 이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동해신묘가 있는 마을이 조산리(造山里)인 것은 설악산의 맥이 중도에 끊긴 것을 잇기 위해 이 지역 사람들이 마을 주변에 산을 만들고 숲을 조성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동해신묘 주변의 소나무숲은 베어내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으나 마을 주민들이 이를 막고 지켜 오늘에 이른 것이다. 주민들은 소나무숲을 지키고 소나무숲은 재해로부터 주민들을 지켜주는 선순환의 원리가 적용된 곳이 조산숲이다.


양양_조산리_동해신묘_20191017 (9).JPG 소나무숲에 둘러싸인 동해신묘


양양_조산리_동해신묘_20191017 (14).JPG 동해묘 안에 있는 동해광덕용왕 신위


양양 남대천을 건넌다. 넓은 하구에 맑은 남대천의 물이 흐르고 하구 습지가 보인다. 양양 남대천은 송이축제와 연어축제로 유명한 곳이다. 연어축제는 연어를 잡아먹는데 치중하는 소비형 축제이다. 이제는 하도의 교란 중지, 수중보에 적절한 어도의 설치, 상류에 연어의 산란처와 치어의 서식지 개선 등을 통해 축제기간뿐만 아니라 1년 내내 연어를 만날 수 있는 생태관광을 실시해야 한다. 최근 양양군에서는 남대천 주변의 도로 개설, 어도가 있는 보와 징검다리의 설치 등을 통해 남대천의 관광환경을 개선하려 하고 있다. 이번을 기회로 양양 남대천이 생태관광의 대표 지역으로 거듭나길 기대해 본다.


20200218_101537.jpg 남대천에서 바라본 설악산의 모습
20200218_101808.jpg 남대천하구와 바다가 만나는 경계인 사주


20200218_102434.jpg 남대천하구의 갈대습지


낙산대교를 건너 송전해변의 솔밭을 바라보며 걷는다. 얼마나 소나무가 많으면 송전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하지만 이곳의 솔밭도 야금야금 개발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바다가 가까이 있고 동명천과 만나는 습지가 있는 오산리는 선사시대에도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었다. 바다 쪽으로는 리조트가 들어서 옛 모습을 읽을 수 없지만 습지에는 오산리 선사유적박물관이 들어서 자연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옛날에는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은 생물들도 살기 좋았는데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이제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대부분의 생물들이 쫓겨나는 시대가 되었다. 조금이라도 사람의 손길을 덜 탄 곳이 사람 자신에게도 좋은 환경이 되는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오산리와 도화리를 지나 수산항의 입구에 도착하기까지 이 넓은 길에 걷는 사람은 나 혼자다. 가끔씩 지나가는 차에서 신기한 듯 바라보는 이들만 빼면 참 기분 좋은 걷기 여행길이다.




20200218_103945.jpg 송전해변의 소나무숲
20200218_105840.jpg 오산리 선사유적박물관과 갈대습지
20200218_110849.jpg 수산항 입구의 해파랑길 종합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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